2)전자책· 수필

가을날에는

김현거사 2012. 11. 2. 09:41
    가을날에는

 

 가을날에는 도심의 보도 위에 낙엽이 휘날린다. 노랗고 붉은 단풍들은 누군가가 쓴 편지 같다. 어디서 방황하다 사라질지 모르는 수신인 불명의 편지, 그것이 낙엽의 편지다. 지나간 시간 내마음도 갈 곳 잃은 낙엽 편지가 되곤 했다. 계절은 한 해의 끝으로 가고 있다. 바람은 가로등 불빛을 흔들고, 마음을 흔든다. 세월이 흘러도 낙엽을 보면 마음이 흔들린다. 가을비 촉촉히 나리는 날, 어디 초라한 카페를 찾아가 독한 칵테일이라도 마시고 싶다. 거기 저만치 눈빛 고운 여인이 앉아있으면 좋겠다. 은백 머리칼과 그의 스카프를 한참을 바라보리라. 그냥 저만치 멀찍이 앉아서 바라만 보리라. 우리는 인생의 파란만장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이제 종점에 도달한 철새다. 그런 면에서 서로 동지다. 우리는 이제 그리움도 병이란 걸 알만한 나이. 사랑이 올 때 한없이 사람 애를 태우고 와서, 갈 때 가슴을 도려내고 간다는 것 쯤은 알만한 나이다. 그런 면에서 동지다. 

 

 

 노인이 좀 주책이면 어떠랴. 나는 거리에 나서면 젊은 아가씨들을 유심히 쳐다본다. 말처럼 탄력있는 다리를 가진 아가씨. 귀고리 단 아가씨.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 한 아가씨. 젖은 머루알 눈동자 아가씨, 석류알같은 고운 치아 아가씨, 베레모를 눌러 쓴 아가씨, 입가에 수줍음 가득한 아가씨. 그들 곁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소로 그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실국화마냥 청초한 향기를 맡아본다. 온갖 그들의 귀여운 음성을 귀 열고 들어본다. 아름다운 미소를 꽃인양 바라본다. 젊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들은 걸어다니는 꽃이다. 움직이는 그림이다. 삶의 환희를 노래하는 새다. 싱싱한 그들 가슴 속에는 피었다 언젠가 시들 사랑이 움 트고 있으리라. 필 때 한없이 곱고, 시들 때 한없이 애처러운 사랑이 싹 트고 있으리라. 그들은 잠시 빤작이다 사라지는 유성이다. 한때의 그 고운 섬광을 나는 무심히 지나갈 수 없다. 나는 그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리고 아득한 시간 저쪽의 어떤 소녀도 생각한다. 

 

  가을날에는 나무에게서 떠나는 법을 배운다. 가을이면 나무는 시드는 법을 시범한다. 어떤 나무는 삭막하게 시든다. 어떤 나무는 시퍼러둥둥 하게 꼴 사납게 시든다. 그렇지 않은 나무도 있다. 단풍나무의 끝은 기모노에 그려진 그림처럼 깔끔하다. 빨강 노랑 연초록 세 빛의 하모니는 전위예술 이다. 거침없이 타오르는 마지막 불꽃이 아름답다. 은행나무도 그렇다. 은행나무는 잎이 물들면 황금빛 후광에 둘러쌓인 귀부인 같다. 인생을 달관한 은은함을 지녀, 문득 생채기 나고 찢긴 마음을 호소하고 싶다. 이렇게 아름다운 끝도 있구나 싶다. 이름답게 가는 자의 뒷모습이 이런 것이다 싶다. 이들이 모델이다. 이제 곧 쓸쓸한 바람 부는 나목의 계절이다. 그런 가을 날, 나는 단풍나무 은행나무를 찾아가서 떠나는 법을 묻는다.    

'2)전자책·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이 오는 소리   (0) 2012.11.29
  (0) 2012.11.07
속초에 가신다면  (0) 2012.10.11
고향의 감나무처럼   (0) 2012.09.30
나는 이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0) 2012.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