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풍경과 글

수운암(峀雲庵)에 대한 기문(記文)

김현거사 2011. 7. 6. 16:43

 

수운암 기문(岫雲庵 記文)은 조선시대의 4대 문장가이며 여한 9대가이기도 한 택당 이식(1584~1647)이 쓴 계산지(啓山志) 의 여러 글 중의 하나이다.계산지는 택당이 백아곡(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쌍학2리 안골마을)에 아버지를 비롯한 조상의 묘소를 옮기고 택풍당을 짓기까지의 과정과 백아곡의 위치,지형,산세,선대묘 등에 관한 내용을 글로 정리해 놓은 책으로 유명한 택풍당지(澤風堂志)도 계산지안에 들어있다.

수운암 기문(岫雲庵 記文)은 덕수이씨 택당가의 원찰인 수운암을 짓고 편액을 걸기까지의 경과. 주변 산줄기와 위치와 지형.지세를 기록한 것으로 내용이 정확함은 물론 4대문장가 다운 묘사로 그 분의 면모를 새롭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한국고전번역원의 번역문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수운암(峀雲庵)에 대한 기문(記文)

庵名以峀雲(암명이수운)암자(庵子)의 이름을 수운(峀雲)이라고 한 것은

記實景也(기실경야)실제의 경물(景物)을 기록한 것이다.

菴在砥峴大山中(암재지현대산중)암자는 지현(砥峴)의 대산(大山) 안에 있는데,

占地高邃(점지고수)위치하고 있는 그 땅이 높고도 그윽하다.

自谷底望之常見雲氣蓊渤(자곡저망지상견운기옹발)골짜기 아래에서 쳐다보면 항상 구름 기운이 무성하게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又坐庵中俯瞰(우좌암중부감)그리고 암자 속에 앉아서 내려다보면

群巒環帀군만환잡)뭇 산봉우리들이 고리처럼 에워싸고 있어서

川陸皆隱천륙개은)냇물이나 평지가 모두 숨겨진 채 보이지 않는다.

而晨夕雲嵐(내신석운람)그러나 아침저녁으로 구름과 안개가

呑吐旋繞(탄토선요)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휘돌아 감싸고 있는 모습들이

皆爲勝觀(개위승관)모두 보기에 멋들어지기 때문에,

故特揭焉(고특게언)특별히 이 이름을 내걸게 된 것이다.

庵爲僧居(암위승거)이 암자에 승려들이 거주하고 있는데도

而不以奉佛取義者(내불이봉불취의자)부처를 받드는 뜻을 취하지 않은 것은,

以吾而援之非正也(이오내원지비정야)나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런 뜻을 이끌어 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庵在墳山(암재분산)그리고 이 암자가 분산(墳山)의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도

而不以奉先取義者(내불이봉선취의자)선조를 받드는 뜻을 취하지 않은 것은,

以僧而專之非禮也(이승내전지비예지)승려의 입장을 생각해 볼 때 오로지 그러한 의미만 부여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麗俗設齋追薦(여속설재추천)고려(高麗) 때에는 재(齋)를 올려서 죽은 사람을 천도(薦度)하는 풍속이 있었으니,

故有所謂願堂則然矣(고유소위원당칙연의)이른바 원당(願堂)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我國則無是也(아국칙무시야)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런 것이 없는데도

而猶循習爲稱(내유순습위칭)여전히 과거의 풍습을 따라 그렇게 칭한다면,

能無後代之疑乎(능무후대지의호)후대의 의심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余於是庵(여어시암)나는 이 암자에 대해서

竊取晦翁寒泉之義(절취회옹한천지의)나름대로 회옹(晦翁 주희(朱熹)의 호임)의 한천 정사(寒泉精舍)의 뜻을 취하는 동시에

而兼寓陶令廬社之趣(내겸우도령여사지취)도령(陶令)의 여사(廬社)의 정취를 부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주D-001]도령(陶令)의 여사(廬社)의 정취

故摘歸去來辭中字名之(고적귀거래사중자명지)그래서 ‘귀거래사(歸去來辭)’ 가운데 나오는 자구(字句)를 뽑아 이 암자의 이름을 붙였으니, [주D-002]귀거래사(歸去來辭) …… 붙였으니

不徒以景象也(불도이경상야)이렇게 보면 또 실제의 경물(景物)만을 취한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噫(애)아,

自兵興以來(자병여이래)병란(兵亂)이 일어난 이래로

役煩民散(역번민산)노역(勞役)이 번거로워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僧俗俱困(승속구인)승속(僧俗) 모두가 고통을 당하였다.

余又貧弱甚常(여우빈약심상)그리고 나 역시 너무나도 빈약(貧弱)한 나머지

不保塚戶(불보총호)묘호(墓戶)를 보유하지도 못했으니,

而比庵實爲此山外護(내비암실차산외호)이 암자 하나가 그야말로 이 산을 밖에서 보호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하겠다.

菴以在此山(암이재차산)그런데 암자에 거주하는 승려들의 입장에서도

故不比他寺刹應役(고불비타사찰응역)암자가 바로 이 산속에 있기 때문에 노역에 응해야 하는 다른 사찰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而宴坐超然(내연좌초연)편히 앉아서 초연하게 지낼 수가 있다.

是山與菴交相資(시산여암교상자)그러고 보면 이 산과 이 암자가 서로들 도와 주는 관계에 있으니,

亦報施之道也(역보시지도야)이 또한 상호간에 보답하며 베풀어 주는 도리를 행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雖然(수연)비록 그렇긴 하지만,

雲自山出而爲山之容態(운자출내위산지용태)구름이 산에서 나와서 산의 모습을 장식해 주면서도

出沒無心而能潤物(출몰무심내능윤물)어디까지나 무심하게 나왔다 들어갔다 하기 때문에 만물을 윤택하게 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比之山與庵(비지산여암)이것을 산과 암자의 관계에 비유해 보아도 좋을 것이니,

適以理道相益也(적이리도상익야)그저 산과 암자가 자연스러운 이법(理法)에 따라서 서로들 유익하게 해 주면 그뿐이요,

不可有心而望報也(불가유심내망보야)뭔가 의식적인 마음을 굳이 가지고서 보답을 바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山名馬山(산명마산)산의 이름은 마산(馬山)이요,

谷曰白鵶(곡왈백아)아골짜기의 이름은 백아(白鵶)인데,

本土人號也(본토인호야)이는 본래 여기에 살던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余始聞術人言(여시문술인언)그런데 내가 당초에 술인(術人)의 말을 들어 보건대,

此山乃五臺山中脈(차산내오대산중맥)이 산이 바로 오대산(五臺山)의 중맥(中脈)에 해당되는 만큼

合名以中臺(합명이중대)중대(中臺)라고 명명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故今從之(고금종지)그래서 지금은 이를 따르려 한다.

 

萬曆癸丑(만력계축)만력(萬曆) 계축년(1613, 광해군 5)에

余始卜先墓于谷內(여시복선묘우곡내)내가 선묘(先墓)의 터를 골짜기 안에 처음 잡으면서

卽相菴基(즉상암기)암자의 터도 그때 함께 봐 두었는데,

有志而未就(유지내미취)암자를 세울 생각만 가지고 있었을 뿐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後二十二年甲戌(후이십이년갑술)그러다가 22년이 지난 갑술년(1634, 인조 12)에

山人志海等(산인지해등)승려 지해(志海) 등이

始結茆居之(시결묘거지)처음으로 여기에다 초막을 짓고 거처하였으며,

越五年戊寅(월오년무인)그로부터 5년 뒤인 무인년(1638, 인조 16)에는

余守先妣喪于墓下(여수선비상우묘하)내가 선비(先妣)의 상을 당해 묘소 아래에서 여막(廬幕) 생활을 하게 되었다.

始屬海及哲會(시속해내철회)이때 비로소 지해와 철회(哲會)에게 일을 맡겨

主幹營建(주간영건)공사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又有妙信者繼之(우유묘신자계지)그 뒤에는 또 묘신(玅信)이라는 자가 이 일을 이어 나갔다.

菴之名始立(암지명시립)이렇게 해서 암자의 이름이 처음으로 세워지게 되었는데,

而山人亦有自遠來棲者(내산인역유자원래서자)이제는 먼 곳에서부터 찾아와서 여기에 머무는 승려들도 있게 되었다.

不幸乙酉山火(불행을유산화)그런데 불행히도 을유년(1645, 인조 23)에 산불이 일어나는 바람에

竝與諸僧囊橐而燼焉(병여제승낭탁내신언)여러 승려들의 소지품까지도 모조리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於是允禪比丘(어시윤선비구)이에 윤선(允禪) 비구(比丘)가 앞장서서

倡謀重建(창모중건)중건(重建)을 도모하여

與諸禪宿(여제선숙)여러 선숙(禪宿)들과 함께 서원(誓願)을 세우고

結盟協志(결맹협지)뜻을 모은 뒤에

拓舊而恢新(척구내회신)옛터를 넓혀 새로이 확장하는 공사를 벌이기 시작하였는데,

未及期而翼瓦巋然(미급기내익와규연)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날아갈 듯한 기와 지붕이 우뚝 세워지게 되었다.

益以夾室前軒(익이래협실전헌)그리하여 협실(夾室)과 전헌(前軒)이 더해졌음은 물론이요,

庖廚庾偪(주방유핍)주방(廚房)과 곳간까지도

無不具通(무불구통)모두 갖추어진 가운데

共二十餘間(공이십여간)도합 20여 칸의 암자가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繼有普眼比丘(계유보안비구)그 뒤를 이어서 또 보안(普眼) 비구가

主幹粧完(주간장완)치장하는 일을 주관하여 마무리를 지었다.

始揭菴額而記其始末(시게암액내기기시말)이에 비로소 암자의 편액(扁額)을 내걸게 되었으므로, 그 시말(始末)을 서술하는

竝敍助緣人姓名于後(병서조연인성명유후)동시에 이 일을 도와 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의 성명을 뒤에 기록하게 되었다.

 

噫(애)아,

以今世之艱荒與余之貧弊(이금세지간황여여지빈폐)오늘날 세상이 온통 어렵고 황폐해진 가운데 나 역시 힘이 빈약하기만 하니,

苟非諸比丘信心願力(구비제비구신심원력)여러 비구들의 신심(信心)과 원력(願力)이 없었던들,

何以就此之亟也(하이취차지극야)어떻게 이처럼 속히 이 일을 끝낼 수가 있었겠는가.

其亦奇乎哉(기역기호재)생각하면 이 일이 또한 기이하다고도 하겠다.

聖上之二十四年丙戌(성상지이십사년병술)성상(聖上) 24년 병술에

德水後人澤堂李植汝固父記(덕수후인택당이식여고보기)덕수(德水) 후인(後人) 택당 이식 여고보(汝固父)는 쓰다.

 

[주D-001]도령(陶令)의 여사(廬社)의 정취 :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의 고승인 혜원(惠遠)과 교유했던 것을 말한다. 혜원이 객을 전송할 때에 사찰 밖의 호계(虎溪)를 건너는 일이 없었는데, 도연명과 육수정(陸修靜)을 전송할 적에는 마음이 서로 계합(契合)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호계를 건넜으므로 세 사람이 함께 웃었다는 ‘호계 삼소(虎溪三笑)’의 고사가 전한다. 《蓮社高賢傳 百二十三人傳》

[주D-002]귀거래사(歸去來辭) …… 붙였으니 :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 “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에서 나오고, 새는 날다 지쳐서 돌아올 줄을 아는구나.[雲無心以出峀 鳥倦飛而知還]”라는 말이 나오는데, 수운암(峀雲庵)이라는 이름을 여기에서 발췌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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