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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친구 권창은

김현거사 2021. 9. 3. 00:11

대학 시절 친구 권창은 

일흔 넘어 그동안 끄적거린 미완성 원고들을 간추려 없애다 보니, 쓰레기통에 그냥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대학 시절 친구 권창은에 대한 글이다. 권창은은 내가 68년 복학하자 동국대 불교학과서 고대 철학과로 편입 온 친구다. 그와 나 둘의 공통점은 찢어지게 가난하던 점이다. 나는 효자동 육군 대령 집 입주 가정교사로 숙식을 해결했고 등록금은 장학금에 의존하고 있었다. 간혹 점심 굶는 날은 도서관 앞 잔디밭에 혼자 앉아, 분배의 모순과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공산 사회를 예언한 마르크스 엥겔스 공저 <자본론>을 읽곤 했다. 창은이는 강원도 횡성 촌놈이다. 아들 하나 믿고 올라온 홀어머니는 도봉산 밑의 토굴에 살았는데, 옆에 청계천 피복노조 전태일 집이 있었다. 그는 매번 주머니에 버스 토큰 두 개, '백양' 열 가치, 김 열 장과 멸치 볶음과 병 김치가 든 도시락 들고 왔고, 입주 가정교사였던 나 역시 궁한 건 오십 보 백보였다. 우리는 법학이나 상학 같은 취직을 위한 학문 배우는 학생을 속물로 여겼고, 만나기만 하면 칸트와 헤겔, 노자와 장자에 열 올렸다. 그때 우리는 청춘이었다.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청량리 588 불빛을 보면서 여자 이야기 많이 했다. 그때 창은이는 경험 많은듯 실전 이야길 들려주곤 했지만, 전부 허풍이었다. 호랑이 배지 달고 만원 버스에서 우리 K대생이 처갓집 정도로 여기던  S대 여학생에게 어떻게 눈을 맞추고 말을 걸고, 하숙집 식모 아가씨를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무용담이었다. 둘은 워낙 가난해 여학생이 반응을 보여도 데이트할 돈도 없었다. 그냥 말로 허기를 채웠으니, 나는 신세계 백화점 다니던 인물 곱던 대령 처제가 아침 등교 시간에 꼭 내 시간에 버스 같이 타고, 안암동 축제 이야기 물어보며 어떤 암시 던졌지만, 한 번도 데려가지 못했다. 둘은 가물에 콩나물 나듯 한 학기 한번쯤 학교 앞 포장마차에 가곤 했다. 가면 둘은 소주 한 잔 꼬치 하나 시켜놓고, '백양' 담배 꽁초가 다 타서 손가락이 뜨거워질 때까지 빨면서 칸트와 헤겔 이야기만 노가리 풀었다. 포장마차 주인이 장사 끝났다고 선언해야 나오곤 했다.  

창은이는 나보다 한 학기 먼저 졸업했는데, 매 학기 장학금 받았지만 취직이 문제였다. 실력은 좋은데, 그의 생김새가 노트르담의 꼽추처럼 추남이다. 과가 철학과라 그런지 도통 취직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해 어느 섬 공사장에서 일하는 형님 찾아가서 몇 달 있다가 새우젖 한 드럼 가지고 나와 장사하겠다고 했지만, 장사 아무나 하나? 내게 상의를 하길래, 이렇게 충고해주었다. '아무래도 자네는 조물주가 특별하게 만든 놈이야. 머리는 알 대머리에 곱슬곱슬한 고수머리지, 눈알은 툭 튀어나왔지, 체격은 초라하지, 잘하는 건 논리학 배웠다고 잘 따지는 거, 자존심 강한 거밖에 없잖아? 자네는 하늘이 사회 적응 꼴등 작품으로 낸 물건이니 일찌감치 취직 포기하고 대학원 가! 좀 치사하지만, 안면 철판 깔고 교수 바지가랑이 붙잡고 애걸복걸하면 어쩌까? 거지도 학교 안 거지는 괜찮으니, 일단 새우젖 판 돈으로 첫 학기 등록하고 물고늘어지면 뒤는 장학금으로 어찌 안 되겠나?'

그는 이렇게 내 말 듣고 대학원 진학 했고, 일이 풀려 얼마 뒤 희랍으로 날랐다. 떠나기 전 같이 희랍 가기로 했다면서 영문과 대학원 출신 미인을 소개했는데, 그 아가씨는 경기여고 나온 서울 출신인데, 둘은 박사가 운명이던 모양이다. 10년 후 귀국할 때, 남자는 아테네 대학 철학박사, 여자는 문학박사였다. 그런데 박사 받아온 것은 잘됐지만, 희랍에서 돈 없어 그랬는지, 동거할 공간이 없어 그랬던지, 식도 올리지 못하고 있다가 귀국 전 거기 대사 주선으로 식을 올리고 왔다. 

둘 다 한국 최초 희랍 박사들이지만, 만리 타향에서 10년 간 얼마나 가난을 겪으며 살았던지, 내가 만나니 거의 빨갱이 수준이었다. 그 당시 나 역시 가난한 신문기자였다. 먹는 쌀이 바닥나 같은 철학과 출신 아내 눈에 이슬이 맺히게 하던 시절이지만, 그래도 이들이 전화라도 있어야 대학과 연락을 취할 수 있을게 아닌가. 그래 결심하고 '모교에서 자네 연락처나 알아야 연락이 올 거 아닌가' 하면서 백색전화 하나 놓아주었다. 그 뒤 둘이 모교 강의를 얻어, '이젠 살게되었구나 잘 살아라'라고 축원을 해줬는데, 좀 있다가 학보에 이상한 글이 실리기 시작했다. 철학과 권창은 교수가 그 배경이었다. 다른 교수도 있었지만  철학과 권 박사가 주동이었다. 그래 하루는 같이 도봉산을 올라가다가 등산로 옆 주점에 아침 10시에 들어가 막걸리 마시며 오후 8시까지 장장 10시간 토론을 벌였다. '체제에 대한 비판, 가진 자에 대한 불만 사상 가지면 개인적으로 평생 잘 살긴 글렀다. 그게 신문기자로 많은 사람들 만나본 내 생각이다. 분배 문제는 자본주의의 결점이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 경제는 급속도 성장을 하고 있다. 철학교수가 개인적 가난의 경험으로 거기 찬물 끼얹는 건 생각해볼 문제다. 그것보다 먼저 생각해봐라. 우리가 자신을 음지 독버섯 같은 존재로 만들 필요가 있나?' 그게 나의 주장이었다. 그날 거기서 두 사람이 백양 담배를 몇 갑 피웠는지 모르겠다. 좌우간 권박사는 그날 내 이야기에 동조, 그 이후 학교신문에 그런 글 싣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젊어 고생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 말 말짱 헛것이다. 젊어 지나친 고생과 스트레스는 중년 이후 불치의 병으로 나타난다. 10년 후 98년 봄에 권이 악성 뇌종양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죽 쒀서 개 준다는 말 생각났다. 박사 된 지 10년 만에 저세상 간다니 너무 억울했다. 그래 죽기 전에 이승에서 먹고 싶은 거나 먹으라고 친구들에게 5만 원씩 추렴해서 30만 원을 봉투에 넣어 가봤더니, 집은 상계동 열몇 평 좁은 아파트인데, 겨우 엉덩이 비비고 앉을자리 밖에 없다. 가구는 없고 희랍서 가져온 기념품 몇 개 초라하게 책상 위에 놓여있다. 뇌종양 환자가 담배를 피우다 서울대 병원서 강제퇴원당했다고 한다. 집에서 상황버섯을 다려먹고 있는데, 부인이 찾아온 손님에게 내놓을 게 없으니, 올리브 열매 몇 알과 시든 과일 몇 쪽 내놓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진다. 아직도 강의하느냐 물어보니, 권 박사가 정교수 되면서 자기는 그만두고 희랍 비극 번역한다고 했다. 희랍 문학은 서구 문학의 기초이다. 희랍 비극은 서양 학자들이 배우는 분야인데, 그 희랍어 한국어 직역은 부인이 한국에서 처음이다. 당시 국내 희랍어 작품은 대개 영역에서 한국어로 번역한 이중 번역이다. 부인은 경기여고 동창회에서 '자랑스런 경기여고인' 표창패 받은 적 있다. 그러나 집안 살림은 이토록 어려웠다. 

그 뒤 권 박사는 병세가 호전되어 다시 학교에 나갔다. 당시 도올 김용옥이 부교수로 있었는데, 그가 쓴 <여자란 무엇인가>란 책은 하바드 박사 출신 책이라 해서 장안의 시선을 끌었으나 처신엔 문제가 있었다. 태도가 오만하여 교수들 눈 밖에 났고, 모두 내보내자고 했다. 당시 권박사가 학과장으로 과의 어른이라 내가 권에게 '그 친구 버르장머리는 없어도 그 때문에 요즘 대중들이 모처럼 철학에 관심이 쏠리잖아? 그런 친구 하나 쯤 데리고 있어도 되는데...' 하고 충고했지만, 아무래도 동양 철학의 중심은 예(禮)다. 말과 행동이 어긋나서 학교는 도올을 내보냈다. 실업자가 된 도올은 그 뒤 원광대인가에 가서 한의학을 배웠다.

그 얼마 후 권 박사는 병이 재발했다. 그때 동기 민군식은 삼육재활원 이사장이고, 귄 오진은 증권 신문 회장이고, 한 해 후배 원대연이 삼성물산 대표였다. 그들에게 연락해서 두번 째 봉투 하나 만들어 안암동 병원엘 찾아가니, 의사들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박사님은 이미 시한이 지났는데 더 지체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생명에 대한 미련과 애착이 없는게 그 이유인 것 같습니다. 생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스트레스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보통 그런 것이 병을 재촉하는데, 박사님은 철학교수라 그런지 전혀 그런 게 없습니다. 그게 임종이 평화롭게 서서히 오는 이유인 거 같습니다' 그 말 듣고 나는 느낀 게 많았다. 훗날 내 임종도 권 박처럼 해야겠다는 다짐했다. 생사(生死)는 종이 한 장 같다. 그 앞 뒤 차이란 건 생각의 차이일 뿐, 결국 하나인 것이다. 

나는 권박사가 임종하기 전 두어 번 더 만났다. 그가 죽기 직전에 내게 보여준 행동이 지금도 인상 깊다. 그는 골수암이  깊어 회복 기미가 없자, 인생을 터득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한번은 나에게 담배를 하나 달라고 했다. '아니 이 사람아 골수암인데 내가 누구한테 욕 얻어먹으라고 그런 부탁 하나? 그러자, '골수암이 지금 치료한다고 낫는가? 글쎄 하나 줘' 했다. 그 뜻은 우리 둘이 밤늦은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담배 피우지 않았나. 그때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같이 한 대 피우고 싶단 것이다. 그래 사람 없는 데 데려가 한 대 주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다. 퀀디션이 좋으니 자기가 술 한 잔 사겠다는 것이다. '이 친구야! 같이 술 먹고 내가 누구한테 욕을 뒤집어쓰라고?' 그러자, '아닐세! 내가 자네한테 꼭 술 한 잔 사고 싶어 그러네' 조용한 목소리로 그랬다.  그 뜻 알만했다. 그래 잔 건배하자, 권은 딱 한 잔만 마셨고, 계산은 자기가 했다. 이승의 마지막 잔이었다.

며칠 뒤 부인 연락을 받았다. 상계동 병원에 가보니 그는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부인으로서 차마 의사에게 남편 호홉기 떼라는 말을 입에 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 내가, '알았습니다. 마지막 순간 육체는 정지해도 의식은 뚜렷하다 합니다. 내가 권박한테 마지막 인사말 하겠습니다' 한 후 권에게 말했다. '권 박사! 지금 자네는 마지막 단말마의 고통을 당하는 중일세. 무척 괴로울 걸세. 그러나 그 고통을 견디면 다시 소생할 가능성이 있으면 모를까 이건 무익한 고통이네. 이 장면 지켜보는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부인도 고통스럽고, 친구인 나도 괴롭네. 또 당신 자신도 괴롭고. 그러니 차라리 고통의 시간을 줄이는 게 합리적인 것일세. 잘 가게! 다음 세상이 있다면 거기서 우리 다시 만나세. 영원히 자네를 잊지 못할 것이네' 그리고 의사 불러 호흡기를 떼었다. 그 후 그는 딱 두어 번 숨을 쉬다가 숨이 멎었다. 생명은 호흡 간에 있다는 불교 말씀 그대로다. 생명이 허망했다.

권 박사는 임종 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내게 가르쳐 주었다. 어차피 오는 죽음이라면 평화롭게 맞아야 한다. 영정은 철학과 동기 권오진 회장 차에 싣고 갔고, 장례는 파주 희랍정교회 묘지에서 치렀다. 묘지 자리는 내가 잡아주었다. 그때 장례미사 집전한 희랍 정교회 신부님 생각난다. <대부>란 영화 장면 같았다. 고요한 검은 수사복 차림에 가슴까지 내려온 백발이 성성하시던 신부님 모습 인상 깊었다. 장엄하고 아름답던 미사음악도 그랬다. 권 박사의 마지막이 그처럼 아름다울 수 없었다. 지금도 장례미사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