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사와 오간 편지

김철우 수필가/ 동영상 제작

김현거사 2020. 4. 5. 21:28

선생님, '아침을 여는 수필'을 만드는 김철우 수필가입니다. 일전에 보내주셨던 '답산의 의미'를 읽고 저희가 낭독과 영상으로 제작하고 싶은 마음이입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프로필과 '답산의 의미'를 포함하여 두 작품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원고지 15매 내외의 작품으로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김철우 kc0377@nate.com 010-7233-3377


김철우 수필가님께


한국 문학의 현주소가 일반 독자와 현격한 거리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동영상을 통해서 일반인에게 수필을 소개할려는 시도는 매우 뜻있는 쾌거라 사료됩니다.

앞으로 크게 발전되면 좋겠습니다.

작품 2점 보내면서, 동영상은 시각적 효과가 매우 중요한데 해당 사진이 없어

좀 주저됩니다.  

1.'답산의 의미'는 산 사진, 2. '강변에 서면'은 진주 남강 사진. 3. '바위, 그 여러 모습에 대한 명상'은

수석이나 바위 사진이 없군요. 

그래 산이나 바위에 관한 수필 건은 참고로 개자원화보의 그림 몇 장 첨가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창현

e-mail  12kim28@hanmail.net


약력

아남그룹 회장 비서실장. 동우대학 겸임교수.

청다문학회 회장.  남강문학협회 수석부회장.

저서

<재미있는 고전여행(김영사)>

<한잎 조각배에 실은 것은(소소리)>

<작은 열쇄가 큰 문을 연다(아남그룹 창업주 자서전)>

<나의 인생 여정(장재걸 선생 자서전)>

 찬불가 가사 3편 공모 당선

전자책

<나는 이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내가 만난 대통령>

<책 한 권에 소개한 한국사상 25편>

<어느 수필가가 쓴 전원교향곡>




 


 <강변에 서면>                                                                                                                 

 

  전에는 강이란 물고기 잡고 멱 감고 노는 곳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제 강변에 서면, 나는 강물의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안개 속에서, 별빛 아래서, 나는 강의 다정한 속삭임을 들으면서 강이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임을 깨닫는다. 강도 나처럼 절벽에 비스듬히 선 노송을 사랑했고, 바위를 사랑했고, 빈 나룻배를 사랑했다. 강도 나처럼 이끼 낀 성벽을 좋아했고. 다리의 외로운 가로등을 좋아했고, 기적을 울리며 떠나는 기차를 좋아했다. 강도 나처럼 구비구비 굽은 길 헤쳐오며, 때로 탄식하고, 때로 울부짖고, 때로 환희의 노래를 불렀다. 강도 나처럼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 돌아갈 수 없고. 한번 이별한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을 알고있다. 

 강과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닮은 존재인지 모른다. 아니 나 자신이 작은 강인지 모른다. 강에 수많은 별이 비치다 사라지듯, 내마음 속에도 얼마나 그리운 별들이  비치다 사라졌던가. 강이 흘러온 시간과 여정을 탄식하듯, 나 역시 얼마나 흘러온 시간과 여정을 탄식했던가. 우리는 마음이란 계절 따라 얼었다 녹았다 하는 변덕쟁이란 걸 알았고, 세월은 쏜살같이 달아나는 심술쟁이란 걸 깨달았다. 우리는 남풍에 실려온 봄처럼 목적지 없이 떠난 에뜨랑제였고, 밤하늘 유성의 궤적으로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지는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강의 그 쓸쓸한 미소를 좋아한다. 나에게서도 강은 아마 그런 미소를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쓸쓸한 자의 미소를 서로 교환한다. 강은 싸파이어처럼 푸르고, 여신의 눈동자처럼 신비한 눈동자를 갖고있다. 나는 강의 그 눈물 같이 푸른 눈동자 앞에서, 젊은 날 뭉게구름 같던 꿈과 사랑했던 소녀를 회상한다. 그때 강은 참회를 들어주는 신부님이다. 내가 강 앞에서 명상에 잠기면, 그때 강은 명상을 지도하는 스님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 나는 고향에 가도 아는 사람 드물다. 머리는 백발이고, 몸에 지병도 있다. 이제 나는 고향에 가도 나그네다. 그 나그네에게 또다른 나그네가 노래를 불러준다. 강이다. 모두가 떠난 고향에 강만 남아있다. 그 노래는 요람에서 아기를 잠재우는 어머님의 자장가처럼 고요하다. 고향 밤거리를 울리고 사라진 누군가의 옛노래 같기도 하다. 그래 나는 이제 고향에 가도 쓸쓸하지 않다. 거기 어머니 같은 강, 남강이 있기 때문이다. 



 <바위. 그 여러 모습에 대한 명상>

 

 산이 아름다운 것은 산에 바위와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물과 구름과 안개도 있지만, 물은 하산하기 급급한 나그네요, 구름은 허공을 떠도는 방랑자요, 안개는 아침 저녂에만 나타나는 요정이다. 반면 바위와 나무는 항상 산에 머무는, 산 그 자체 이다. 둘을 비교하면, 바위는 남성 이고, 나무는 여성 이다. 바위는 철학자고, 나무는 시인 이다. 바위는 명상을 하게하고, 나무는 시심을 키워준다. 그 중 바위는 산의 뼈대이며, 땅의 기가 모인 곳이다. 그래서 기암절경은 바위에서 나오고, 바위가 없는 산은 평범한 산이 되고만다. 

 

    바위가 많은 산을 악산(岳山)이라 하고, 흙이 많은 산을 육산(肉山)이라 부른다. 설악산과 북악산은 악산에 속한다. 만장같이 거대한 바위가 산정에 버티고 앉아서 천하를 굽어보는 모습처럼 웅혼한 것은 없다. 인간에게 외경심을 가져다준다. 안개에 쌓여서 모습을 반쯤 보였다가 숨겼다가 숨바꼭질을 하는 암봉보다 신비한 것은 없다. 우리에게 구름을 밟고 하늘로 올라가는 환상을 안겨준다. 바위가 있어야 나무는 그 진면목을 발휘한다. 진달래가 곱게  핀 절벽은 우리에게 봄의 환희를 알려준다. 담쟁이 잎 처절한 붉은 빛에 덮힌 암벽은 우리에게 만추의 애상을 보여준다. 천지 가득한 백설의 암봉에 솟은 구불구불 휘어진 늙은 나무가 화려한 눈꽃을 달고 있는 모습은 우리에게 겨울의 고요를 알려준다. 그 위에 삼존불이 새겨진 바위도 있다. 그 위에 돌탑이 쌓여진 바위도 있다. 그 아래 약수가 솟아나는 바위도 있다. 깊이를 알 수없는 동굴을 가진 바위도 있다.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도 있다. 강이나 산, 구름과 폭포 무늬를 지닌 바위도 있다. 사람이나 새나 거북이 형상의 바위도 있다. 평원처럼 평평한 바위, 산이나 절벽을 닮은 바위, 그냥 추상적으로 생긴 바위도 있다. 이 모든 바위가 다 신비하다.

 

 나는 이 모든 바위를 볼 때 먼저 이끼부터 살펴본다. 바위가 가장 바위다운 품격을 지니려면 우선 이끼가 아름다워야 한다. 이끼는 태고 때부터 착용한 바위의 유일한 옷 이다. 가장 고운 이끼는 '비단이끼'다. '비단이끼'는 최고급 초록빛 카페트 같다. 산신이 와서 쉬어갈 요량으로 펼쳐 놓은 비단이불 같다. 너무나 부드럽고 미끈하여 무심히 발을 딪기에는 뭔가 미안하다. 그 곳에 씨앗은 바람에 날라와서 보일듯말듯 가날픈 꽃을 피운다. 참으로 신비스럽다. '서리이끼'란 것이 있다. 주로 고산의 큰 바위에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데, 색깔이 서리가 내린듯 하얗다. 고산의 준엄함과 깔끔함이 내비쳐, 이끼 중에서 가장 품격이 높다. 해발 1천미터 이상의 바위에는 석이(石耳) 버섯이 자란다. 흑지(黑芝), 석지(石芝)라고도 불리는데, 항암작용이 있으며, 오래 먹으면 얼굴색이 좋아지며, 눈을 밝게 한다. 이런 이끼와 석이가 온통 표면을 뒤덮은 바위야말로 제대로 격을 갖춘 바위이다. 이런 바위 앞에 정좌하면 가장 고요한 명상에 빠질 수 있다.

  

 바위의 또다른 매력은 폭포 옆에서 볼 수 있다. 천인절벽 밑으로 은하수처럼 폭포가 떨어지는 곳에 있는 위태로운 바위는 장엄미와 비장미를 지녔다. 경탄과 외경을 느끼게 한다. 천둥같은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하얀 물줄기는 바위를 만나면 산산히 부서진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의 위력을 받아내는 바위의 모습은 장엄하고 호쾌하다. 작은 외부 충격에 흔들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뒤돌아보게 한다. 절벽에 용처럼 뿌리를 서린 노송은 바위의 다정한 친구다. 둘이 만난 모습은 한 폭 그림이다. 물보라 속에 나무와 암석이 서로 굳건히 껴안은 모습은, 우리에게 삶의 자세가 어때야 하는지를 가르켜준다. 간혹 물 위로 평평한 대를 이루고 뻗어나간 넓은 반석을 볼 수 있다. 그  아래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물결에 낙화가 떨어져 흘러가는 모습, 안개 속에 목덜미에 푸른 띠를 두른 어여쁜 새가 날아와 목을 축이는 광경은, 참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드는 청량제다.

 

 

 선인들은 바위 옆에 난초나 국화를 키웠다. 매화나 대나무를 심기도 했다. 바위는 말이 없지만, 이들의 조화는 오히려 고결하다. 바위는 천년을 침묵하지만, 사람들은 바위에게 가련한 백년의 꿈을 의탁했다. 불상을 새기고, 경전을 보관했다. 돈황 석굴에 불경을 보관했고, 사해 근처의 한 동굴에 희브리어로 씌여진 성경을 보관했다. 나는 선천후천 세계를 관통한 바위를 신성하게 생각한다. 바위를 미륵이나 부처로 생각한다. 명상의 스승으로 생각하고, 기도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종교와 철학의 산실로 생각하고, 현자의 거처로 생각한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바위 앞에서, 나는 난초나 국화처럼, 매화나 대나무처럼 살고 싶다. 총총한 별빛을 벗 삼아, 고고한 침묵을 배우고 싶다. 인위적 흔적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암석 앞에서, 나는 수도하는 스님처럼 1천7백 개의 공안을 풀어보고 싶다.


영상 제작 참고 사진(중국 개자원화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