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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오케스트라처럼 시작된다

김현거사 2018. 1. 29. 12:51

 봄은 오케스트라처럼 시작된다

 

 봄은 오케스트라처럼 시작된다.

 오케스트라 제1장은 봄비가 터트린다. 봄비는 무대 청소부터 한다. 먼지와 오물을 깨끗이 씻어버린다. 그 다음 봄이다 봄이다 산새가 운다. 산새가 야단법석 치면 동백꽃이 핀다. 동백꽃은 '라트라비아타‘의 주인공 비올레타마냥 슬프다. 그 곁을 지키는 새가 동박새다. 동박새는 풀륫처럼 청아한 목소리로 운다. 

  '호오, 호케꼬, 케꼬' 휘파람새가 휘파람 불며 나타난다. 그 소리에 얼굴 내미는 꽃이 수선화다. 수선화는 동토의 여인이다. 얼음 뚫고 올라온 파란 새촉과 하얀 알뿌리가 차급기 그지없다. 봄바람은 왈쓰다. 수선화가 발레를 시작한다. 바람은 수선화의 하얀 토슈즈(Toe Shoes)를 들춰본다. 

 수선화와 친한 친구가 매화다. 매화는 봄비를 좋아한다. 젖은 얼굴 청초하다. 콤팩트 없는 데도 몸에서 향기가 난다.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오케스트라 제2장은 개울이 시작한다. 졸졸졸 얼음 녹기 전에 진달래꽃 핀다. 겨울은 나그네, 눈 쌓인 산길로 혼자 걸어가버렸다. 진달래는 입술에 보라빛 루즈 칠했다. 사람을 숲으로 유혹한다. 홀딱벗고.. 홀딱벗고.. 이때 두견새는 이렇게 노래한다. 미당은 '귀촉도'에서 진달래를 이리 표현했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진달래 단짝이 개나리다. 개나리는 키다리 소녀다. 초록 스카프 손목에 감았다. 가녀린 가지에 무수한 황금의 종을 달아, 바람 불면 은은한 황금 종소리 들린다. 땅에 떨어진 그 종소리 노란 병아리가 재빨리 물고 간다. 

 

  오케스트라의 절정은 종달새가 터트린다. 삣쫑 삣삐 삣쫑! 종달새가 청보리밭 높이 치솟아 울면, 벌은 웅웅, 나비는 너울너울, 벌 나비 나타난다. 들판에 돌미나리 고들빼기 돋아난다. 산 너머 남촌에서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나? 하늘은 청자빛이다. 제비는 새끼 치고, 박새, 곤줄박이  호른과 크라리넷 소리 낸다. 천지가 은총과 축복에 쌓인다. 새소리 성스럽게 들린다. 

 이때 산은 수채화를 그린다. 봉긋봉긋한 젖가슴, 늘씬한 허리에 화사한 산벚꽃이 핀다. 안개 덮힌 산은 기모노 입은 여인 같다. 버들은 연록색 저고리, 느티나무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입었다. 

'산은 구강산(九江山) 보랏빛 석산(石山).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은 발을 씻는다.' 

이때 목월은 '산도화(山桃花)'를 이리 읊었다.

 꽃들은 사육제의 밤 가면무도회에 초대 받은 아가씨다. 목련과 앵도는 겨울 동안 기다렸다. 저마다 현란한 의상 입고 무대에 등장한다. 혹은 순결하고 혹은 요염한 모습으로 향연 벌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끝이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영랑이 시를 읊으면, 오케스트라는 멎고, 3개월 봄 축제는 막을 내린다. 꽃의 여왕 모란이 지면 봄은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