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라 천리 길>
이 이야기는 어느 토요일 한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다. 그는 은퇴하자 진주(晋州) 모 대학 겸임교수가 되어 매주 강의 차 내려갔다고 한다. 대개는 고향 친구와 어울리지만, 그날은 별로 연락되는 친구가 없어 드라이브 겸 신안동 들판으로 차를 몰았다고 한다.
마침 망진산 절벽 위에 솟은 달이 남강에 비치고 있더라고 한다. ‘습지원’은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주변이 한낮같이 밝은데, 모래톱에는 하얀 해오라비 몇 마리가 졸고있더라고 한다. 그 모습은 너무나 고요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어린 시절 배건너 육거리 길에 평상을 내놓고 그 위에 들어누워 바라보던 달이 생각 나더라고 한다. 평상에 모이던 얼굴들이 생각나더라고 한다. 정수는 40년을 서울서 살았다. 무얼 찾아 그동안 타향을 헤매였는가, 문득 눈시울이 시큰하더라고 한다. 모든 걸 팽개치고 당장 '습지원' 근처 땅에 초막 하나 짓고 싶더라고 한다.
그런데 거기 낮설은 강이 하나 보이더라고 한다. 꼬불꼬불 달빛 아래 흘러내려오는 샛강이 운치있더라고 한다. 마치 무엇에 홀린 것 같았다고 한다. 강을 따라가보니, 대밭이 나오고, 그 옆에 한옥이 한 채 있더라고 한다. 골기와 푸른 이끼가 고풍스럽더라고 한다. 대나무 사립문이 있고, 그 너머로 소나무와 석탑이 보이더라고 한다.
‘누가 저런 집에 살까!’
정수는 그런 집에 살기가 평소 소원이었다.
‘누구세요?’
옥구슬 굴리는듯 맑은 목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고 삼십 초반 여인이 나타나는데, 피부가 비에 젖은 배꽃 같더라고 한다.
‘어머나! 교수님 아니세요?’
여인이 먼저 자기를 알아보더라고 한다. 난초처럼 가는 눈섶이 인상적이더라고 한다.
'가만 있자, 누구시더라...?'
정수는 기억이 없었다.
'칠암동 다도회에 교수님 나오셨잖아요?'
원망하듯 여인이 말했다고 한다.
‘여기 사십니까?'
이렇게 여인을 만났다고 한다.
‘교수님! 어쩌면 교수님께서...’
여인은 흥분해서 말끝을 흐리면서, 벗어놓은 신발을 뒤에 가지런히 해놓고 거실로 올라오는데, 지금 세상에 누가 벗어놓은 신발 가지런히 해놓고 올라오는 사람 있느냐 싶더라고 한다. 이 세상 것 아닌 것 같은 달빛이 창가에 놓인 난초 화분을 비치고 있고, 밖에는 개구리 울음소리만 요란했다고 한다.
‘마치 월궁 선녀를 뵌듯 합니다.'
그 말에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교수님 아직 식전이시지요?'
이리 묻더니 부얶에 가서 잠시 후 추어탕을 내오는데, 미리 알고 준비해놓은듯 싶더라고 한다. 식기는 고태 나는 놋그릇이고, 추어탕은 따끈하고, 산초는 향기롭더라고 한다. 무릅을 꿇고 앞에 앉아, 두손으로 공손히 수저를 건네주더라고 한다.
‘머루주 한 잔 드릴까요?’
그리고 머루주까지 권하더라고 한다. 현관에서 신발 가지런히 한 것, 상 앞에 무릅 끓고 수저를 건넨 일이 정수는 너무나 맘에 들더라고 한다.
사실 김교수는 서울 생활에 그늘이 있는 편이다. 서울 출신 아내는 상전이다. 담배 피운다고 구박하고, 화분에 물주라, 자동차 세차 하라 지시하고, 식사 하고나면 설겆이 시킨다. 김교수 입맛 어떤지 묻지않고 자기 취향 음식 재료만 사고, 걸핏하면 하루 세끼 '삼식이'가 어디 있느냐고 구박한다.
자식도 마찬가지였다. 강남에 집 주고 내보낸 아들은 대기업 부장이고, 며느리는 고등학교 교사지만, 손자 데리고 오는 일 없다. 년봉 합이 1억 넘지만 외국 여행 다녀오라며 봉투 내민 적 없다. 부모가 병원에 입원해도 문병도 안온다. 딸도 마찬가지다. 외국에서 박사 학위 받고 돌아온 교수지만 보약 한 첩 지어온 적 없다. 불효막심한 배신자들에겐 왕년에 돈벌던 기계는 이제 폐품이었다.
객지에서 찬밥 신세로 떠돌던 정수는 40년 후에 장든 고향의 옛풍속을 만난 것이다. 고향 여인은 늦가을 감나무 가지 끝 이슬 맞은 홍시처럼 고왔다. 추어탕 보다 따끈한 여인의 마음, 오래된 놋그릇처럼 기품있는 여인의 모습이 가슴을 후벼파더라고 한다. 이런 여인을 두고 왜 서울서 결혼했던가. 그런 한탄에 잠겨있는데, 달은 휘영청 밝지 빈 집에서 미인이 술을 권하지, 어느 목석같은 남자가 반하지 않을 수 있겠더냐 싶더란다. 마침 라디오에서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 저기 저 모양이 될 터이니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성주풀이'가 들려왔다고 한다. 정수는 맘을 흔들려,
'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 저기 저 모양이 될 터인데...'
이렇게 나직히 한탄한느데, 여인은 말 없이 잔을 채워주더라고 한다.
'술은 많이 마신다고 좋은 것 아니고, 단 한 잔 마셔도 이렇게 운치가 있어야 천금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
이 대목에서 정수가 득의양양하여 덧붙인 말이다.
그날 정수는 밤늦도록 이야기 나누고, 새도 잠 든 밤에 돌아왔다고 한다.
‘ 진주에 오시면 꼭 저희 집 찾아주셔요.'
여인이 차 앞에서 그리 부탁하더라고 한다. '꼭'이라는 그 말이 너무 행복하더라고 한다.
진주라 천리길(2)
그 뒤 정수는 진주에 가면 꼭 그 집에 들렀다고 한다. 하얀 탱자꽃이 향기를 풍기던 초여름, 여인은 평상에 상을 채렸다. 뻐꾹뻐꾹 나동면 골짝에서 뻐국새 울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여인은 따끈따끈한 쌀밥과 사근사근한 묵은지, 그리고 삼천포서 잡아온 노릇노릇한 갈치구이를 준비했다. 옆에 대나무 뿌리로 손잡이 만든 백자주전자에 머루주가 담겨있었다. 이런 건 서울서 꿈도 못꾸던 것이다.
식사 전에 여인이 그 손목을 덤썩 잡고싶은 생각이 나는 가늘고 매끈한 손으로 얌전히 두 손으로 수저를 받쳐 권하더라고 한다.
'이런 손목을 섬섬옥수라고 하지요. ’
정수가 이렇게 말하자 여인의 얼굴은 잠시 흔들리는 복숭아꽃처럼 붉어진다. 그리고
‘교수님, 명함 있으시면 한 장 주실 수 있습니까?’
묻더라고 한다.
‘은퇴한 사람은 명함 쓸 일이 별로 없어서요.'
그러면서
' 내 이름은 김정수라 합니다.'
하고 말하자,
‘저는 밝을 소(昭), 계집 희(姬), 소희라 부릅니다.’
기다린듯 소희가 자기 이름을 밝히더라고 한다. 이렇게 통성명 끝나자 정수는
'나는 고향이 진주인데..., 소희씨는?’
하고 물었다고 한다.
‘저는 어릴 때 쌍계사 근처에서 컸습니다.’
‘쌍계사 근처요? 거긴 내가 차밭 하나 해보려고 몇 번 간 적이 있는데....’
이렇게 말하여 이야기가 급물살 탔다고 한다.
'차밭 하기 아주 좋은 곳이 있어요. 언제 교수님이 시간 내시면 제가 안내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어 그후 두 사람이 그 땅을 방문했다고 한다. 사실 정수는 지리산 밑에서 차밭을 하고싶어 땅을 많이 보러다녔다. 중산리를 비롯해서 약초 많은 덕산, 가을 전어 유명한 곤양, 산수유 유명한 구례 산동마을까지 다녔다. 그 중 가장 맘에 든 곳이 그곳이다. 거기는 섬진강이 있고 벚꽃 유명한 화계동천이 있다. 쌍계사 아래 위 길가 여기저기 차밭 많다. 차 키우는 사람들은 차 담아내는 수많은 청자 백자 잔과 주전자가 있고, 통나무 원목 탁자 있고, 저마다 차 만드는 비법이 있다. 정수는 그런 사람들과 차 이야기 나누며 살고 싶었다.
그런데 소희가 좋은 후보지 안다는 것이다. 그 터에 야생 차나무와 석창포가 많다고 한다. 그것도 정수 맘에 쏙 들었다. 야생 차나무는 귀한 것이다. 오래된 차나무는 차밭 가진 사람에겐 보물이다. 석창포도 그렇다. 뿌리가 용처럼 얽힌 석창포는 선비들이 책상에 올려놓고 완상한 물건이다. 석창포는 기억력을 좋게하고, 그 우린 물로 단오에 여인들이 머리를 감던 약초다.
동의보감에 중국의 장수촌(長壽村) 이야기가 실려있다. 거긴 산에 야생 국화가 많아 그 뿌리를 적시고 내려온 물을 마신 사람들은 모두 장수했다고 한다. 차도 약이다. 야생 차나무 자라는 곳도 신령스런 곳이다.
이런저런 생각하는 사이 차가 쌍계사 윗동네 의신마을에서 닿았다. 거기 물빛은 에메랄드 빛이다. 근처에 세이암(洗耳岩)이란 곳이 있다. 최고운 선생이 속세와 인연을 끊겠다고 귀를 씻은 곳이다. 청산은 흰구름에 덮혀있고, 물소리 새소리만 들린다. 벽소령쪽에 그 장소가 있었다. 바위 사이로 세찬 물줄기가 흐르고, 함박꽃인지 산수국인지 알 수 없는 꽃이 가득 피어 있다. 계곡을 꽃향기로 덮었다.
소희가 말한 땅은 천여평 쯤 되었다. 평평한 땅 군데군데 큰 바위가 있다. 층층 폭포 이룬 물가에 석창포 군락이 있고, 바위 옆에 야생 차나무 있다. 물에 참게가 많다고 한다. 가을에 잡아 통에 담아 나락을 먹여 키우면 별미라 한다.
두 사람을 신발 풀고 계곡에 발을 담궜다. 시원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환상입니다.’
정수가 감탄하자, 소희가 팔을 내밀었다. 마침 옆에 넓직한 너럭바위 있다. 손을 맞잡고 맨발로 그 위로 올라갔다.
‘신선의 땅 같습니다.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 입니다.’
정수는 이리 말하며 소희를 당겨 끌어안았다.
‘여기가 제가 교수님께 안내하고 싶었던 곳이에요.’
그러면서 소희는 준비해온
꽃 수놓은 비단 누비보를 풀었다. 술은 야생 복숭아주라 했다. 안주는 은어구이 였다. 술잔은 대나무 술잔이다.'이건 선도주(仙桃酒)고 이건 죽통 술잔이군요.'
정수가 잔을 마시자 소희는 젓가락으로 은어구이를 입에 넣어준 후 손수건을 꺼내 입숧을 닦아준다.
‘가만있자. 이래서는 않되지. 내 오늘 시 한 수 읊으리다.'
'비 맞으며 솔 모종 옮기고, 구름에 쌓인 대사립문 닫네.
산에 핀 꽃은 수놓은 장막보다 좋고, 뜰 앞의 잣나무는 비단휘장이 되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나무꾼이 시를 읊자 선녀가 화답한다.
'아무도 와서 내게 무얼 묻지마라. 나는 일찌기 세상과 맞지않았으니. 이 시 원감(園鑑)국사의 시 맞지요?'
소희가 이렇게 말했다. 정수는 ‘아무도 내게 와서 묻지 말라 내 일찌기 세상과 맞지않았으니,' 같은 속세 초월한 고승의 시가 설마 소희 입에서 나올 줄 몰랐다.
'동문선(東文選)에 실려있는 이 시를 아버님이 좋아하셨어요.'
소희가 말했다. 부친이 한시 하던 분인 모양이다.
이런 여인은 평생 기다려도 만나기 어렵다고 정수는 생각했다. 꿈에서나 만날 이런 여인 놓치면 않된다.
‘그럼 우리 둘이 여기 와서 같이 차밭 하면서 삽시다.’
‘교수님만 원하시면 저는 문제 없어요. 곁에서 차 끓일게요.’
하더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미 마음은 주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선 말로 서로 밀고당기고 할 필요없다. 상대 애태우는 기교도 필요없다. 솔직하면 그만이다.
'소희씨는 내가 꿈에서 찾아헤맨 여인입니다.'
김교수가 말하자,
'교수님은 처음 뵌 순간부터 제가 사모한 분이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교수는 형언할 수 없는 환희가 넘쳐오름을 느껴, 소희의 손목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고 한다.
'기분이 이상해요’
소희가 손을 빼려하길래.
‘싫어요?’
물어보니,
‘아니예요.’
소희가 황급히 대답하더라고 한다.
김교수가 소희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당기자, 하는듯 마는듯 가벼운 저항이 있었지만, 소희는 눈 감은채 입술을 열어주더라고 한다. 떨리는 소희의 입술은 하얀 배꽃처럼 차갑고 향기롭더라고 한다. 노을은 카펫처럼 바위 위 이끼에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고 한다. 들리는 것은 오직 물소리 뿐이었다고 한다.
(2회 끝)
진주라 천리길/3
밤하늘 별과 별은 참으로 멀리 떨어진 존재다. 그러나 밤하늘에서 별이 한번 부딪치면 하나가 된다. 정수도 그와 같았다. 그 후 정수는 진주 내려가면 으례히 소희 집에 머물었다. 소희의 집 밖은 전원이다. 냇물 건너편은 반송(盤松) 키우는 넓은 밭이다. 마당 한쪽에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안에 돌을 모아 만든 석가산이 있다. 거기 구부러진 매화나무는 소희 아버님이 산천재(山天齋)에 가서 남명매(南冥梅) 매실을 주워와 싹을 틔운 것이다. 봄이면 두사람이 묘목을 구하기 위해 진주 중앙시장에 나가곤 했다.
'뽕나무는 오디도 좋지만, 쌍백피로 차 끓이면 당뇨에도 좋지요'
소희가 이리 말하고 산뽕을 고르면,
'개복숭아는 꽃도 좋고, 술 담그면 좋지요'
정수가 개복숭아를 집어든다.
'교수님을 위해서 가을엔 국화주 담아야겠네요'
소희가 감국을 사면.
'그대 위해서 모란 몇그루 사야지요'
정수가 모란을 샀다.
전라도나 경상도의 남녁 사람들은 대개 꽃과 나무를 사랑한다. 그게 서울 사람하고 다른 점이다. 지금 서울은 대개 마당이 없고마당에 분재 하나 쯤은 놓고 산다. 그게 서울 여자하고 다른 점이다.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사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뽕나무 아래서는 한가하게 장닭이 울고, 매화와 복숭아 꽃이 피고, 감과 포도 자두 열매가 달렸다.
시장에서 붕어와 잉어도 사왔다. 정수는 붕어나 잉어찜을 특히 좋아한다. 붕어나 잉어는 깨끗이 손질 한 후 양념이 잘 배도록 칼집을 낸 후 시래기와 무를 밑에 깔고 , 간장, 고추장, 다진 마늘, 생강, 청주, 후춧가루 등을 끼얹어 가면서 뼈가 완전히 흐물흐물해지도록 끓이면 천하 별미다. 살이 달콤하고 뼈는 칼슘의 보고다. 두 사람은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란 책을 보며 연못에 붕어와 잉어를 키웠다. 산림경제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못을 파는데, 못 가운데 산을 쌓는다. 알 밴 잉어 20 마리와 수잉어 3척짜리 네마리를 2월에 못 속에 넣고, 4개월 지나면 신수(神守, 자라)를 넣고, 6개월 후 두번째 자라를, 8개월에 세번째 자라를 넣는다. 잉어는 숫자가 많으면 달아나버리는데, 자라가 있으면 달아나지 않는다. 이듬해 2월이 되면 길이 1척짜리 잉어 1만 마리, 2척짜리 4천 마리, 3척짜리 4만 마리를 얻게되고, 다음 해는 1척짜리 10만 마리, 2척짜리 5만 마리, 3척짜리 4만 마리를 얻게 된다.
영배(癭杯, 나무 혹으로 만든 술잔)
포화피(蒲花被, 갈대꽃 이불)
소희는 시를 아는 여인이다. 목련꽃 하염없이 떨어지는 봄날엔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진주 출신 이형기의 <낙화>를 외기도 했다. 가을 철 달밤엔 ‘그것은 머언 벌판에 눈이 오는 소리다. 차라리 그것은 머언 벌판에 비가 오는 소리다. 강물처럼 나직이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다.’ 최계락의 <낙엽>을 외기도 했다.
두 사람의 즐거움은 끝이 없었다. 아침 즐거움은 대밭의 새소리 듣는 것이고, 저녁 즐거움은 달빛 구경하는 것이다. 소희가 사는 곳 앞은 강이고, 강 건너는 높은 절벽이다. 밤 늦어 두 사람은 절에서 쓰는 선등(禪燈)을 창가에 걸어놓고 오지 탕관에 하얀 차연기 올리며 바둑을 두곤 했다. 두면 달은 대밭을 배회하고 있다. 벽에는 추사 글씨 주련(柱聯)이 걸려있다. ‘靜坐處 茶半香初(조용히 앉은 곳에 반 쯤 익은 차의 첫향기가 일어나고) 妙用時 水流花開(묘용을 얻은 때에,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 추사는 이 문장으로 차의 경지를 차선일미(茶禪一味)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소희는 차를 내올 때, 아주 희귀한 차반(茶盤)을 들고나온다. 그건 땅 속에 오래 묻혀서 지열로 석탄처럼 광택이 나는 참나무 매목(埋木)으로 만든 것이다. 소희는 차 마실 때 화병에 꽂는 차화(茶花)같이 향기로운 여인이었다.
진주 효당(曉堂) 최범술은 <한국의 차도>란 책을 남겼다. 스님은 젊은 시절 박열의사와 일본천황 암살 계획을 세워 상해에서 폭탄을 운반해오고, 조선불교청년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했다. 그의 차 이론은 간결하다. '화로에 불 피우고, 물을 끓이고, 물 끓는 소리에서 솔바람 소리 듣고, 찻잔을 씻고, 다실을 청소하며, 다기(茶器)나 서화, 정원의 멋을 감상하면서, 달과 흰구름 벗삼는 고요한 사색의 생활'이 곧 차도 생활이었다. 차도는 전라도 무등산 아래 의제 허백련이 있다면, 경상도 봉명산 다솔사에 효당 최범술이 있다.
차를 즐기기에는 물소리 맑은 곳이 제격이다. 대나무 숲에 빗소리 들리는 곳도 좋다. 안개와 별빛 고운 곳도 좋다. 죽로(竹爐)에 차 끓이는 소리 잘 들리는 곳도 좋다. 별빛 고운 곳은 꽃이 청초하게 핀다. 소희가 사는 곳이 그런 곳 이다.
소희는 차를 사랑하는 여인이다. 이른 새벽이면 소희는 옷매무새 단정히 하고 향을 피워놓고 차를 준비하곤 했다. 차 끓이는 하얀 연기는 대밭에 퍼진다. 그때 소희는 그림 속의 미인이 된다. 대밭도 청초하고 소희도 청초하다. 댓잎은 바람에 흔들리고, 새는 지저귄다. 그러면서 남강변 아침이 밝아오는 것이다.
그에게는 아버님이 물려준 이조다완과 초화문 접시가 있었다. 진주 근처엔 도자기를 굽던 옛날 가마터가 많다. 곤양 새미골은 일본 국보로 여기는 이또다완(井戶茶碗)의 출토지라는 설이 있고, 합천 가회면 분청자기 가마터는 고려 때부터 이름난 곳이다. 우리나라 새미골을 의미하는 정호(井戶)다완은 '기사에몽이도'라 불리는 일본의 국보로, 가장 오래된 다완으로 호쾌하기 그지없다. 물레 성형시 마구 당겨 올려, 굵은 물레자국 줄이 크고 깊게 가 있다. 굽 부근은 유약이 거칠게 뭉쳐 있어 이슬이 맺힌 듯하며, 그릇의 빛깔은 살구색을 띠어 부드럽고 오래 보아도 눈이 피로하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 그런 다완은 일본의 성 한 채와도 바뀌주지 않을 정도였다. 그 다완이 탐나서 전쟁을 벌였다는 설도 있으니, 당시 한국에서 막사발로 부르던 그 다완의 가치는 지금 정확히 평가할 수 없다. 소희는 그 진기한 다완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르는 그런 국보급 다완에 차를 따라마시곤 했다.
소희는 계절을 아는 여인이다. 소희는 우아한 문양이 새겨진 초화문 접시에 철 따라 딸기나 자두, 비파같은 과일을 담아내오곤 했다. 하얀 초화문 접시에 놓인 빨간 딸기, 자색 자두, 노란 비파가 너무나 깔끔하였다. 딸기나 자두가 담겨 나오면 여름이고, 감이나 배가 나오면 가을이고, 계피 넣은 수정과 나오면 겨울이다.
소희는 죽순철에 은어가 귀하다고 안타까워 했다. 죽순회에 은어가 제격이기 때문이다.
‘요즘 남강에 은어가 귀해요.’
그러면 정수가 차를 몰아 너우니나 도동으로 나갔다. 은어 잡는 사람을 찾아가 은어를 사오기도 했다.
소희가 가꾸는 텃밭엔 여러 채소가 심어져 있었다. 산초와 오가피, 곰취와 산마늘이 있었는데, 산초와 오가피 잎은 튀김으로 만들고, 곰취와 산마늘은 장아찌로 만들었다. 정수는 소희가 만든 음식은 다 좋아했다. 그 중에서 부추잎에 조갯살 다져넣고 지진 전을 좋아했다. 그래 뜰에 부추를 많이 심었다. 붕어찜도 좋아했다. 그래 붕어 치어를 사다 연못에 길렀고, 붕어찜에 반드시 들어가지 않으면 않되는 방아도 많이 심었다.
봄이면 두사람은 ‘산청 삼매(三梅)’를 구경하러 다녔다. 단속사(斷俗寺)에 정당매(政堂梅)가 있다. 남사 예담촌에는 원정매(元正梅)가 있다. 산천재(山天齋)에는 남명매(南冥梅)가 있다. 단속사는 절은 폐허가 되어 없어졌지만, 거기 정당매(政堂梅)는 남아있다. 정당매란 이름은 거기서 공부한 통정공 강희백이 나중에 정당문학(政堂文學) 대사헌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 부른다. 예담촌의 원정매(元正梅)는 고려말 진천부원군(晉川府院君)에 봉해진 원정공 하즙(河楫)이 심은 7백년 된 매화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다. 집 앞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고 집 뒤에는 강이 흐르는데, 정작 매화나무는 오랜 세월에 용틀임한 모습만 남기고 죽어있다. 산천재(山天齋)에는 영남 선비의 대표하던 남명선생이 심고 가꾼 남명매(南冥梅)가 있다. .
간혹 두 사람은 안개 낀 강을 건너 약수암에 가곤 했다. 그런데 그 강변 절벽 모습이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그림과 똑같다. 강희안은 단속사에 정당매(政堂梅)를 심은 강희백의 손자인데, 소희는 그 풍경이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배경이라고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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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 바로 옆에 있는 것도 구 사람 취향과 잘 맞았다. 두 사람은 약수암 부처님께 ‘지금 우리가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말게 해주소서.’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이율곡의 '산중(山中)'이란 시를 읊기도 했다. '약초 캐다 홀연히 길을 잃었는데(採藥忽迷路) ,봉우리마다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千峰秋葉裏). 산에 사는 스님 물 길어 돌아간 뒤(山僧汲水歸), 숲 끝에 차 달이는 연기 피어오르네(林末茶煙起)'.
소희는 은퇴한 늙은 남편 나몰라라 버려두고 혼자 싸다니는 서울 여인 아니다. 고급 차 호화저택 욕심내는 그런 여인도 아니다. 이당(以堂) 김은호 미인도에 나오는 여인 같다. 촉석공원 아래 골동품 가게에서 커다란 백자 수반을 구해왔다. 거기 연꽃을 피워 올려, 밤에 꽃잎 속에 차를 넣어두었다가, 이튿날 아침 그 차를 권하는 그런 여인이다.
김교수는 서울서 항상 상전을 모시고 살았다. 부인은 신문이나 tv 보면서, 식사 후 설거지 김교수한테 시켰다. 그러나 소희는 다르다. 김교수가 부엌에 들어가면, ‘남자는 절대로 부엌에 들어오면 안돼요.’ 김교수를 몰아내곤 했다. 노년에 김교수는 새 세상을 찾은 것이다.
(3회 끝)
진주라 천리길/4
두 사람의 즐거움은 끝이 없었다. 아침 즐거움은 대밭의 새소리 듣는 것이고, 저녁 즐거움은 달빛 구경하는 것이다. 소희가 사는 곳 앞은 강이고, 강 건너는 높은 절벽이다. 밤 늦어 두 사람이 오지 탕관에 하얀 차연기 올리며 바둑 두면 달은 대밭을 배회하고 있다. 벽에는 추사 글씨 주련(柱聯)이 걸려있다. ‘靜坐處 茶半香初(조용히 앉은 곳에 반 쯤 익은 차의 첫향기가 일어나고) 妙用時 水流花開(묘용을 얻은 때에,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 추사는 이 문장으로 차의 경지를 차선일미(茶禪一味)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소희는 차를 내올 때, 아주 희귀한 차반(茶盤)을 들고나온다. 그건 땅 속에 오래 묻혀서 지열로 석탄처럼 광택이 나는 참나무 매목(埋木)으로 만든 것이다. 소희는 차 마실 때 화병에 꽂는 차화(茶花)같이 향기로운 여인이었다.
진주 효당(曉堂) 최범술은 <한국의 차도>란 책을 남겼다. 스님은 젊은 시절 박열의사와 일본천황 암살 계획을 세워 상해에서 폭탄을 운반해오고, 조선불교청년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했다. 그의 차 이론은 간결하다. '화로에 불 피우고, 물을 끓이고, 물 끓는 소리에서 솔바람 소리 듣고, 찻잔을 씻고, 다실을 청소하며, 다기(茶器)나 서화, 정원의 멋을 감상하면서, 달과 흰구름 벗삼는 고요한 사색의 생활'이 곧 차도 생활이었다. 차도는 전라도 무등산 아래 의제 허백련이 있다면, 경상도 봉명산 다솔사에 효당 최범술이 있다.
차를 즐기기에는 물소리 맑은 곳이 제격이다. 대나무 숲에 빗소리 들리는 곳도 좋다. 안개와 별빛 고운 곳도 좋다. 죽로(竹爐)에 차 끓이는 소리 잘 들리는 곳도 좋다. 별빛 고운 곳은 꽃이 청초하게 핀다. 소희가 사는 곳이 그런 곳 이다.
하루는 바둑 두고 차 마시다가 김교수가 시를 하나 읊었다. 이태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이란 시다.
'꽃나무 사이 술 한 병 놓고 앉아, 아무도 없이 홀로 술을 따르네. 밝은 달 마주하여 잔 들어 올리니, 나와 그림자와 달 셋이 되었네.'
소희는 그 시를 듣더니, '내가 노래하면 달은 거닐고,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따라 춤추네. 깨어서는 함께 즐그이 마시고, 취하면 헤어져 각기 흩어지네. 무정한 교류를 영원히 맺었으니, 서로 다음엔 아득한 은하에서 만나세'란 구절이 너무 가슴 아프다고 했다. 금방 봄비가 배꽃을 적시듯 눈가에 이슬이 촉촉히 맺힌다. 김교수가 소희의 어깨를 다정히 안아주었다.
‘저는 꽃 피는 봄, 잎 지는 가을의 서럽고 야속한 시간 속에 산목련처럼 살았습니다. 행운으로 교수님을 만났는데, 아득한 은하에서 다음에 만나자는 구절이 너무 슬퍼요.'
소희는 달 속의 항아 같고, 김교수는 적선(謫仙) 이태백 같다. 소희는 난초처럼 깨끗한 머리칼로 김교수 뺨을 간지럽히며 와락 김교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교수님을 영원히 사랑해도 되지요?’
뜨거운 입김을 풍기며 소희가 물었다. 늦게 만나 서럽다고 했다.
‘당신은 비파행(琵琶行)’의 주인공 같소. 심양강 달빛 아래서 비파 타던 여인 같아요. 내 어찌 푸른 옷소매를 눈물로 훔뻑 적신 백낙천의 심정을 모르겠소?'
'그러나 제가 교수님을 너무 늦게 만난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불길한 말이요? 우린 영원히 함께 할 터인데...'
'운명이 너무 슬퍼요.'
소희는 무슨 예감을 가지고 있는듯 했다. 밤늦도록 김교수 품을 파고들었다. 그날 밤은 달이 은쟁반처럼 밝았다.
(4회 끝)
진주라 천리길 /終
옛부터 ‘북평양 남진주’라는 말이 있다. 평양과 진주는 풍광 명미하고 인재 많기로 쌍벽인 곳이다.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남강은 시내를 통과하며 흐르고, 바다같이 넓은 진양호는 산을 바다 속 섬처럼 만들어 아름다운 호반길을 보여준다. 평양에 부벽루가 있다면 진주에 촉석루가 있다. 평양 권번과 냉면이 유명하다면 진주 권번과 냉면이 유명하다. 진주는 남강변 촉석 바위와 강 건너 푸른 대숲과 백사장이 볼만 하다.
진주는 가을이면 개천예술제가 열린다. 공원 나무는 단풍이 들고, 강엔 유등이 띄워진다. 주민들로 거리는 인산인해 이루고, 수백대 포장마차가 불야성 이룬다. 그 속을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헤매다녔다. 브라스밴드 소리도 듣고, 낭만에 들뜬 인파 정리하는 경찰관 모습도 본다. 삼바축제 비슷한 이런 축제 때문인지 진주는 음악가와 문인이 많다. 포은 선생은 진주에 들러 하룻밤을 묵었다. 하룻밤을 묵은 곳이 비봉산 앞에 있었던 비봉루(飛鳳樓)였다. 포은 선생이 비봉루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시 한 수를 남겼다.
비봉산전비봉루(飛鳳山前飛鳳樓) 비봉산 앞에는 비봉루 있고
루중숙객몽유유(樓中宿客夢悠悠) 누각에 잠든 객 한가히 꿈꾸네
지령인걸강하정(地靈人傑姜河鄭) 지세 좋고 인물 걸출하니 강·하·정
명여장강만고류(名與長江萬古流) 그 명성 긴 강같이 영원히 흘러가리
촉석루를 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읊었다. <왜적들의 바다를 동으로 바라보고 숱한 세월 흘러, 붉은 누각 우뚝히 산과 언덕을 베고 있네. 강물에 그 옛날 꽃다운 가인의 춤추는 모습 비치고, 단청 새긴 기둥엔 길이 장사들의 시가 쓰여있네 >. 뒤벼리 새벼리 두 벼랑은 봄이면 진달래가 피고, 가을이면 단풍이 곱다. 서쪽 서장대에 오르면 넓은 평거 들판을 끼고 남강은 흘러오고, 밤이면 호국사 종소리가 울린다. 진주 일대는 고령에서 하동까지 무진장한 고령토 광맥이 뻗어있다. 많은 도자기 가마들이 산재해있고, 도예가들도 흔하다. 일본이 국보로 꼽는 이조다완을 만든 발원지가 인근의 진교 백련리라는 설이 있고, 보통 큰 음식점 접시는 대개 도예가가 만든 백자나 분청을 쓴다. 다방은 수석과 골동품이 으례 한두점씩 있고, 고졸한 글씨나 오래된 그림이 걸려있다. <진주라 천리길 내 어이 왔던가. 연자방아 돌고돌아 세월이 흘러가듯 인생은 오락가락 청춘은 늙었더라. 늙어가는 이 청춘에 젊어가는 옛추억. 아! 손을 잡고 헤어졌던 그 사람. 그 사람은 간 곳이 없더라>. 남인수의 대사가 흐른다. 대가야 유적지인 합천에는 무심히 사용한 개 밥그릇도 가야토기였다고 한다. 안의 거창 일대는 강굽이마다 오래된 정자가 세워져 있고, 선비가 머문 고가가 많다. 남자들은 남명선생을 닮아 포부가 크다. 請看千石鐘(보게나 천석들이 종을) 非大叩無聲(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네) 爭似頭流山(어쩌면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하늘이 울어도 울지않을까). 남명의 시처럼, 작은 일에 대범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 여자들은 논개를 본 받아 정열적이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강남콩 보다 푸른 마음 바탕에 양귀비꽃보다 붉은 정열을 가졌다.
두사람은 진주 육회비빔밥집을 찾아가기도하고, 서장대를 거닐고, 호국사와 논개 사당을 탐방 했다.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의암(義岩)을 선비 안종창은 이리 읊었다. <여인이 의를 위해 죽었으니 두가지 덕을 이루었네. 맑고 옥같은 자태에 늠름한 눈서리 같은 지조로다. 왜적 하나 죽였다고 말하지 마라. 모든 간담이 하나같이 철렁했으리라. 여인이라고 작다고 말하지 마라. 만명 장부의 팔같이 휘둘렀네. 강물에 바위돌 닳지 않아 천년 세월 의리가 남아있다네>. 논개의 의기사(義妓司)에는 또하나의 명기, 산홍의 충절을 읊은 매천(梅泉) 황현의 시와 산홍의 시가 나란히 걸려있다. 촉석루 바위 벼랑에는 산홍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매천야록>에는 그가 내무대신이던 매국노 이지용의 잠자리를 거절하고 스스로 자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주 출신 작곡가 이재호는 ‘세세년년’이란 노래를 남기기도 했다. <산홍아 너만 가고 나는 혼자 버리기냐. 너 없는 내가슴은 눈 오는 벌판이다. 달 없는 사막이다, 불 꺼진 항구다 >. 진주는 특히 여인이 아름다운 고도(古都)다.
촉석공원 아래에는 골동상가가 많다. 한번은 김교수가 거기서 청옥 쌍가락지를 발견했다. ‘이 반지가 혹시 논개가 왜장을 껴않고 강물에 뛰어들 때 섬섬옥수에 끼었던 것이 아닐까?’ 김교수는 그 옥가락지를 소희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진주 여인 아니면, 누가 선생님같은 선비한테 이런 희귀한 청옥 가락지를 받는 행복을 가질 수 있을까요?' 가락지를 낀 소희는 이렇게 말했다. '진주 여인이 아니면, 아무나 소희씨처럼 시를 알고, 순결한 사랑을 아는 그런 여인이 있을가요?' 김교수가 응답했다.
소희를 만난 이후 김교수에겐 대학의 여름 겨울 두 방학이 지루했다. 두달간 진주에 갈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9월이 오자, 김교수가 기쁜 마음으로 진주로 떠났다. 덕유산 지나면 육십령터널 나오고, 터널 지나면 지리산이 보인다. 함양 서상 지나면 남강 상류 경호강이 나오고, 경호강 따라가면 진양호가 나온다. 호반의 버들은 벌써 노란 추색이 띄우고 있었다. 진양호만 바라보아도 김교수의 마음은 쿵쾅거렸다. 곧 소희를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서장대 아래로 바삐 차를 몰아 소희가 살던 <습지원> 근처로 갔을 때다. 군데군데에 '아파트 부지 조성' 이라는 큰 팻말을 세워놓고, 불도저들이 터를 닦고 있었다. 넓은 들판이 온통 공사판이다. 소희가 살던 집터를 어림하기 어려웠다. 그래 김교수는 일하는 인부에게 물어보았다. '이 근처 어디에 있던 한옥을 혹시 모르시오?' 그러자 사내가 엉뚱한 대답을 한다. '이 근처는 원래 집이 없었고, 무덤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니 여기에 무덤만 있었다고요?' 놀래서 묻자, '나도 잘 몰라요. 소장님한테 가서 물어 보시오.' 김교수는 현장소장에게서 자세한 이야길 들었다. '원래 그 자리는 백년 전 무덤이 있었습니다. 청화백자와 오래된 바둑판이 나와서 진주 박물관 직원이 나와서 가져갔습니다. 유허에서 청옥 쌍가락지도 나온 걸로 보아 아마 사대부가 여인의 무덤이었지 않느냐고 합디다.' 그 뒤부터 김교수는 진주엘 가면 약수암에 묵었다. 거기선 소희가 살던 강건너가 보인다. 나무관세음보살! 생주괴공(生住壞空)이 연(緣)에 의한 것이라지만, 이승을 초월한 사랑은 어디서 오는것인지요? 김교수는 그때마다 매번 부처님에게 물어보곤 했다.
첫사랑
첫사랑이란 무엇일까? 봄 언덕을 스쳐간 한줄기 훈풍이었을까? 가을 강에 비친 한가닥 달빛이었을까?
사람들은 흔히 진주(晉州)를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한다. 남강이 아름답고 촉석루가 아름답다고 한다. 그 아름다운 전원도시 진주에서 성장한 한 소년이 어떤 소녀를 사랑한 이야기를 여기 소개한다.
그 소녀 이름은 김혜정이다.
소년은 고등학교 일학년 때 천전초등학교 교정에서 열린 동창회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졸업하고 4년만에 만난 동창들은 모두 열일곱살의 사춘기였다. 여학생은 작은 풋복숭처럼 가슴이 볼룩해지고, 여성 특유의 꽃봉오리 같은 태가 나타나기 시작할 때 였다. 이성에 대한 미묘한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학생을 곁눈질하며 공연히 얼굴 붉히면서, 저희들끼리 깔깔대며 웃곤 했다.
남학생 몇은 좀 어른스럽게 보일려고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코밑수염이 나기 시작했고, 입었던 교복은 어깨에 심을 넣었고, 모자챙은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했다. 모두가 번데기가 나비로 될 때 같았다. 이제 막 어른티가 박히기 시작하는 참이었다.
여학생 중에서 정란이, 전자, 인순이, 습천 못가 영자가 먼저 눈에 띄었고, 혜정이는 그 한쪽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때는 내가 위즈위스나 투루게네프, 헬만헷세, 사머셋모음 좋아하던 시절이다. 혜정이는 마치 도브의 샘가에 핀 한떨기 수선화 같았다. 명작 속의 소녀처럼, 곁의 다른 소녀와 전혀 다른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 내가 그의 긴 머리칼과 호수처럼 신비한 눈빛을 본 바로 그 순간이, 큐피트의 화살이 나의 가슴을 명중시킨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이 내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불시에 화살을 맞은 표범처럼, 나는 갑자기 수십만 볼트의 엄청난 전류가 전신을 짜릿짜릿하게 지나감을 느꼈다. 그것은 생전 처음 경험한 엄청나게 감미로운 전율이었다.
첫사랑이 번개처럼 나를 때린 그 이후 일을, 나는 아무 것도 기억 못한다. 누가 노래를 불렀고,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어떻게 동창회가 끝났는지 모른다. 내 신경이란 신경은 오직 혜정이에게만 집중되었다. 아무리 사소한 움직임 하나라도, 혜정이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내마음의 줄을 민감한 악기의 현처럼 바르르 떨리게 하였다. 나는 그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그날 나는 야릇한 흥분 때문에, 교실 밖에 나가서 감나무에 등을 기대고,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만 듣고 있었다. 이윽고 동창회가 끝나고, 혜정이가 떠나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한없이 허전한 마음으로, 꿈결처럼 지켜보고만 있었을 뿐이다.
그날 밤부터 나는 혜정이네 집 근처로 날라간 한마리 나이팅게일 새였다. 탱자나무 울로 둘러쌓인 넓직한 진주농대 학장 관사 밖에서 밤마다 세레나데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혜정이에게 바친 첫 세레나데는, 도입부가 바리톤 저음으로 시작되는 '불 밝던 창'이라는 노래다. '불 밝던 창에 어둠 가득 찼네. 내 사랑 넨나 병든 그때부터. 그의 언니 울며 내게 전한 말은, 내 넨나 죽어 땅에 묻힌 것을...'. 혜정이가 보일듯 말듯 약간 다리를 저는듯 해서, 애잔한 넨나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다.
두번째 세레나데는 엘비스프레슬리의 'Love me tender'였다. '나를 부드럽게 달콤하게 사랑해주오. 결코 떠나게 하지마오.' 사랑을 갈망한 가사 그 자체가 내마음 이었다.
신비한 사랑의 힘에 이끌린 나는 밤마다 혜정이네 집 근처로 가지 않을 수 없었고,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진주의 어느 소녀도 그렇게 혜정이처럼 많은 세레나데를 듣고 성장한 소녀는 없을 것이다.
그 집은, 봄이면 울타리에 하얀 탱자꽃이 피고, 가을이면 노란 탱자가 익었다. 그 안에 우물이 있었다. 달 밝은 밤, 그 우물가에 서있던 소녀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망경산 정상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밑에서 찔레꽃 향기가 풍겨오고, 가끔 주약동 보리밭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려오던 바위다. 거기 바위에 소년이 새긴 '크리스티나로젯티'의 시는 얼마나 애절했던가. 'When I'm dead my Dearest, sing no sad song for me. Plant no roses at my head, nor shaddy Cypress tree.( 내 죽거던 임이여 술픈 노래는 부르지 마오. 장미도 심지말고, 그늘 드리우는 사이프러스나무도 심지마오.)' 소년에게 혜정이는 로젯티 였다. 그 애절한 시는 혜정이가 소년에게 보낸 달콤한 시였다.
그러나 영원히 남기려고, 손에 피멍이 들면서, 못과 망치로 바위에 새긴 그 시는, 훗날 사라져 버렸다. 망경산에 방송탑을 세우면서, 무심한 사람들이 시가 새겨진 그 바위를 발파하여 없애버린 것이다.
사랑의 감정이 싹틀 때 진주는 못견디도록 아름다운 도시다. 봄철 신안동 들판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너우니' 버들숲에 은어가 꼬리치며 올라오는 것을 보면, 남풍이 '당미' 언덕의 벚꽃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가는 것을 보면, 강 너머 칠암동 대숲에 달빛이 어리는 것을 보면, 진주 소년은 모두 시인이 된다.
촉석공원 벤치에 노란 낙엽이 날라가는 것을 보면서, 의암 바위에 황혼이 내리는 것을 보면서, 지드의 '좁은 문'을 읽고 산책을 나가서, 주인 없는 파란 페인트 칠한 과수원집 대문 옆에 나리꽃 만발한 것을 보면서, 진주 소년은 다정다감한 청년으로 성장한다. 새벽 안개 덮힌 서장대에서 남인수 노래 모창하고, 달밤에 이봉조의 ?스폰 흉내 내면서, 진주 소년은 자란다. 그래서 진주 사람은, 거짓말을 업으로 삼는 국회의원조차, 감성이 풍부하다.
당시 혜정이는 어떤 편이냐 하면, 내가 밤마다 자기 집 앞에 와서 세레나데를 부른 그 남학생인건 아는 눈치였다. 그를 찬미하는 남학생이 있다는 것은 소녀로선 우쭐한 일이고, 세상 무엇보다 달콤한 비밀이었을 것이다. 한번 그 얼굴을 보고싶은 유혹도 있었을 것이다. 아침 등교시에 다리 위에서 만나면, 수줍어 하면서 살짝 뒤를 돌아보곤 했다.
아! 그러면 돌아본 그 일 때문에 나는 얼마나 실낱같은 새 용기를 얻고, 고무되고 흥분되었던가. 나는 혜정이 친구 영자가 그렇게 부러웠다. 그는 혜정이와 이야기를 하면서 나란히 걸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천예술제가 열리던 밤, 남강에 유등(流燈)을 띄우는 수많은 남녀 학생들의 인파 속에서, 나는 혜정이를 만날려고, 얼마나 남강변을 여기저기 한없이 쏘다녔던가.
그때 내 모습은 어떤 편이냐 하면, 가슴이 떡 벌어진 소년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백미터 학교 대표였고, 고등학교 때는 축구, 농구, 평행봉, 달리기 등 만능 운동선수 였다.
공부도 그런대로 잘 했고, 숫끼가 좋았다. 쉬는 시간에 교단에 올라가 미치밀러 합창단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흉내내어, 'The sun shines bright in the old Kentucky home'로 시작되는 '켄터키 옛집'이나, 'Way down upon the Swanee river'로 시작되는 '스와니강의 추억'을 원어로 부른 친구는, 나중에 뉴욕에서 의사를 한 우영이와 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운동이라면 운동, 공부라면 공부, 다 잘하던 내가 혜정이 앞에만 가면, 노틀담의 곱추 '콰지모도'였다. 혜정이는 짚씨 여인 '에스메랄다' 였다. 나는 가슴 속에 술처럼 부글부글 끌어오르는 감정을 주체치못해서 얼굴 붉히는 말더듬이 곱추였다. 컨트럴 불가능한 고압전류에 감전된 사고자였다. 두방망이 치는 가슴만 태우는, 젊은 베르테르였고, 가면무도회에서 처음 줄리?을 만난 몬테규가의 로미오였다.
그런 속에 밤마다 혜정이에게 보낼 편지 인용구를 찾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던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간 그 기간에 내가 읽은 책은 아마 백 권도 넘을 것이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짝사랑', 헬만헷세의 '페터카멘친트' '데미안' '싣달타', 사머?모음의 '면도날' '인간의 굴레' '달과 6펜스', 토마스하디의 '테스', 에밀리부론테의 '폭풍의 언덕', 앙드레지드의 '좁은 문' '전원교향악',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듀마휴이스의 '춘희', 섹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 '햄릿', 밀턴의 '실낙원', 나타니엘호손의 '주홍글씨', 릴케의 '말테의 수기' 등이다.
그 밖에 나는 톨스토이, 토스토?스키, 궤테, 룻소, 빅톨유고, 보들레르, 위즈워스, 스땅달, 까뮈, 한스카롯사, 앙드레말로, 레마르크, 싸르트르, 헤밍웨이의 책을 남독(濫讀)하였다.
얼마나 많은 책 속의 여인이 혜정이었던가. 혜정이는 매번 '아?' '잔느' '줄리?' '테스' '넨나'로 변해갔고, 나는 매번 그 상대편 남자였다. 나는 건강한 소년에서, 점점 사랑의 몸살을 앓는 몽상가가 되어갔다.
수많은 편지가 만들어졌고, 편지는 밤마다 혜정이네 대문 너머에 던져졌다. 달을 보고, 구름을 보고, 낙엽을 보고, 강을 보고, 산을 보고, 꽃을 보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감상한 그 모든 감정을 나는 편지에 담았다.
편지 옆에 간혹 꽃다발이 놓이기도 했다. 그 꽃은, 운동을 잘하던 나같은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갈 수 없는, 가파른 망경산 절벽에서 꺽어온 꽃이다. 진주에서 자란 그 어느 소녀가, 혜정이처럼 그렇게 목슴을 걸고 꺽어온, 그런 노란 원추리, 붉은 참나리, 보라빛 들국화를 선물 받을 수 있었겠는가.
지금도 내 서재에는 그 당시 일기장이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거기에는 꽃을 꺽으려고 그 위험한 절벽을 오르내린 소년의 심정이 고스란히 적혀있다. 아무도 못오는 절벽 가운데 굴을 파놓고, 혜정이와 살고싶었던 한 소년의 꿈이 적혀있다.
아무튼, 성장하면서 글씨체가 몇번 바뀌고, 영어를 자주 인용한 유치한 내 소년기 일기장은, 60년 전 시간을 가르키는 시계처럼 멈춘채, 빛 바랜 옛날 그 시간에 딱 머물고 있다.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한 영혼의 성장과정이 소롯이 담긴 그 수백통의 편지를, 아직도 혜정이가 한편이라도 간직하고 있어서, 그걸 돌려준다는 가설이 불가능한 점이다.
이렇게, 첫사랑은 나를 일기를 쓰는 소년으로 만들고, 철학을 동경하는 청년으로 만들었다. 혜정이가 없었다면, 나는 사대 체육과에 가서 체육선생이 되었지, 결코 철학과에 입학하고, 신문기자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 소녀가 한 소년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그러나 모든 턴넬은 끝이 있는 법. 혜정이에 대한 7년간 짝사랑도 끝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키엘케골의 처녀작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나오는 자전소설 <유혹자의 일기> 같았다. 나 역시, 사랑을 관념에서 시작해서 관념으로 끝난 점에서 키엘케골 비슷하였다. 말한마듸 건네지 못하고,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관념적 프라토닉 사랑도 끝이 있었다.
그때 혜정이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나는 군인이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자 그 해 자원입대하였는데, 가장 친하던 친구가 재수생이 되어 진주에 남아있다가, 주약동에서 철도자살을 한 이유의 대부분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진학한 나는 내가 벌써 무슨 큰 사상가인양, 사흘이 멀다하고 왕래한 편지에서. 걸핏하면 허무니 절망이니 실존이니, 철학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문학을 동경하는 젊은이가 흔히 그러듯, 허무와 절망을 무슨 값어치 있는 훈장인양 겉에 내비치고 다녔다. 그러다가 친구가 자살한 것이다.
입대하자, 나는 까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뭐르소'였다. 일부러 운전병이 된 후, 외출 나가서 서면 하이에리아 부대 근처 사창가에서 술을 마시고 다녔다. 아무 이유없이 헌병을 구타하고, 헌병 완장과 하이바와 하얀 장갑을 빼앗아 휴가병 돈을 갈취하다가, 제부지역 전 15P 헌병대에 비상이 걸리게 한 적도 있다.
그러다가 혜정이 혼처가 정해진다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임시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가 교사로 근무한 문산초등학교로 찾아간 것이다.
그 때 내 모습은 이랬다. 군복 상하의는 빳빳이 풀먹여 다려입었다. 모자의 병장 계급장을 광약으로 빤짝빤작 딱고, 파리가 낙상할 정도 군화도 매끄럽게 칠했다. 수송병 빨간 마후라를 목에 걸쳤고, 어깨는 떡 벌어졌고, 허리는 잘룩했고, 걷어올린 팔뚝은 구리빛 근육에 덮혀 있었다. 내 일생 그렇게 외모에 신경 쓴 일은 두번 다시 없다.
나무에서 매미가 울고, 잠자리가 날아다니던 문산초등학교 운동장 푸라타나스 그늘 아래서, 나는 종일 화랑담배를 피우며 혜정이를 기다렸다. 이윽고 교정에 하학종이 딸랑딸랑 울리고, 재잘거리는 초등학생들 흐름 속에 퇴근하는 혜정이 모습이 나타나자, 코스모스 하늘대는 신작로를 따라가서, 검은 석탄연기 품으며 들어온 기차에 같이 몸을 실었다.
'오징어 땅콩이요!' '석간신문이요!' 기차 안은 이런 행상들 소리 요란했는데, 원래 통학생들은 그 속에서 소녀에게 닥아가서 말을 건네거나 편지를 건넸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여선생인 혜정이 체면을 고려해서, 낮 모르는 남자가 닥아가서 말을 건네는 수작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기차가 주약동 터널을 통과하고 진주역으로 들어서자, 나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컴컴한 터널 속에서, 말을 붙이려고 생각했으나, 생각만 하다가 기회를 놓친 것이다.
역은 마중나온 사람들과 택시들, 여인숙 호객꾼들로 혼잡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내가 혜정이에게 닥아가 말 건넬 마지막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만 초조했지, 나는 여기서도 그러지를 못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세요.' 그 말 한마듸 하기가 그때는 왜 태산처럼 오르기 힘든 산이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이때 오히려 혜정이가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는 이미 내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다. 수업 중에 교정에서 얼쩡거린 사람, 같이 기차에 올라와서 뭔가 안절부절 하던 그 군인이 누군지 알았던 것 같다. 아마 그는 진작부터 나를 알았을 것이다. 내가 밤마다 집 밖에 와서 <불 밝던 창>과 <러브미텐더>를 부른 그 사람이라는 것을, 초등학교 동창이고, 서울의 모 대학에 진학한 동기인 것을 그는 알았을 것이다.
기차에서 내린 혜정이가 개찰구 방향인 아닌 다른 곳으로 나가고 있었다. 거긴 망진산 쪽이었다. 들판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노란 벼이삭 늘어진 논길엔 메뚜기만 툭툭 튀었다. 대지엔 감미로운 바람이 불고, 산 허리는 황혼에 쌓여 있었다. 산기슭의 외딴 집 굴뚝에선 저?밥 짓는 연기가 고요히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그 길을 혜정이가 한동안 걸어가더니, 이윽고 한 지점에서 고맙게도 고개를 숙인채 조용히 그 자리에 멈춰 서준 것이다. 닥아와서 뭔가 말을 해보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때 내 가슴의 고동은 왜 그렇게 쿵당쿵당 요란히 뛰기만 했던가. 내 입술은 왜 그렇게 바짝 마르고, 다리는 마치 허공을 밟듯 휘청거리기만 했던가. 무슨 말이라도 말을 해야하는데, 턱이 덜덜 떨려 한마듸도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혜정이 옆으로 한걸음이라도 더 닥아가야 하는데, 하반신 전체가 떨려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심장은 얼어붙고, 전신은 사시나무였다. 나는 쿵쾅거리는 내 심장의 고동을 혜정이가 들을까, 오히려 그것만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혜정이를 만나기 전에 미리 할 말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젊은 베르테르가 샬롯테에게 한 말, 라트라비아타에서 알프레드가 비올레타에게 한 말, 릴케가 자기 보다 14살 연상인 유부녀 살로메에게 한 말, <좁은 문>에서 제롬이 마들렌에게 한 말, 로미오가 줄리?에게 한 말들을 미리 읽어보고 준비 했었다. 그러나 이 모든 말들은 소용 없었다.
나는 혜정이 앞에만 가면, 그에게 목슴을 바칠 각오를 하는 중세의 기사였고, 그의 충실한 종이었을 뿐이다. 사랑한다는 말, 그 자체가 나에겐 불경 이었다. 나는 사시나무였지, 말 못하는 벙어리였다. 지극했기에 말 못한, 그것이 나의 비극이었다
부대 내에서 자살한다고 차에 칼빈 실탄을 숨기고 다니고, 외출 중에 헌병을 구타하여 부산 전지역 헌병대에 비상이 걸리게한, 남자사회에서는 맹견같던 내가, 혜정이 앞에서는 너무나 나약한 딴 남자였다. 아마 당시 나에게 수소폭탄같은 큰 충격을 가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있었다면, 그건 물리적 어떤 외부의 힘이 아니라, 혜정이가 우연히 내 쪽으로 보낸, 가슴 철렁하게 만들던, 그 시선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훔쳐본 그 신비한 미소였을 것이다. 내 심장에 엄청난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뇌관은 오직 혜정이였다. 신(神)은 내 생명 어딘가에 그렇게 반응하는 회로를 심어놓은 것 이다.
그때가 가을이었다. 내가 진주 역 근처에서 혜정이와 나란히 서있던, 그 황홀하고 감미롭던 시간이, 몇 분인지 몇 초인지 모르겠다. 그 일분 일초는 아마 내 인생 행로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금새 주변은 어둠에 완전히 덮히고, 먼 동네 등불이 아득히 별처럼 깜박이기 시작했다. 마냥 그렇게 밤새도록 서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혜정이가 천천히 발걸음 떼더니, 멀어져 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가더니, 먼 동네 불빛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쓸쓸한 바람만 불어오고 있었다. '모든 게 끝났다'. 나는 절망하면서, 동네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장승처럼 어둠 속에 서있었다.
혜정이는 먼 유성에서 날라온 요정이었을까. 한 여름밤의 꿈이었을까. 첫사랑은 이렇게 끝났고,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손자까지 둔 이 나이에도, 아직도 내 가슴 속에, 황혼의 안개 낀 들판과, 멀리 어둠 속에 별처럼 깜빡이던 마을의 등불과, 고개 숙이고 서있던 한 소녀 모습이, 천 권의 서사시보다 황홀하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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