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심매도

속초에 가신다면

김현거사 2017. 10. 14. 07:36

 

 

 

 속초에 가신다면

 

 

 속초는 아름다운 도시다. 동해가 품은 진주(眞珠) 같은 도시다.

 속초에 가신다면 무엇부터 볼 것인가? 달빛부터 보아야한다. 달빛이 신선봉에서 화암사로 내려와, 영랑호와 바다에 비친, 그 부드럽고 광활한 누리에 가득한 광경을 보면서, 울산바위 밑을 밤 깊도록 거닐어보아야한다. 월하(月下)에 경전 읽는 소리 들으면 마음이 탈속(脫俗)해지고, 월하에 시를 논하면 운치 표묘하여 속세를 떠나고, 월하에 미인을 보면 번뇌 한없이 높아진다고 한다. 신흥사 극락보전과 부도(浮屠)에 비치는 달빛은 탈속한 친구와 감상하기 좋고, 기러기떼 허공을 나르는 갈대 덮힌 화진포 달빛은 시를 아는 친구와 감상하기 좋으며, 영금정 암벽에 밀려오는 은파는 연인과 보아야 제격이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너무 밝아서 사람에게 답월(踏月)을 강요하거나, 끝내 잔 들어 마시게하는 달빛만이 진정한 달빛이다. 그때 차 속에서 '에딛 삐아프'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엽'(枯葉)을 들어보라. 인생이 월광(月光)에 흩어지는 푸른 담배연기 같음을 알 수 있다. 


 달빛 다음은 단풍을 보아야 한다. 천하 제일 단풍 묻지마라. 한계령(寒溪嶺) 단풍을 보아야한다. 하얀 안개가 산허리에 감겨 눈부시게 피어오르는 한계령에 가보라. 계류 굽이굽이 수정같은 물결 위에 흩어지는 낙엽의 비 만산홍엽(滿山紅葉)인데, 안개는 젖은 바위에 수묵화 그리고 있다. 다정한 사람 손잡고, 수억년 한 점 티끌까지 씻은 준수한 암벽에서 떨어져 벽옥(碧玉)의 물에 꽃처럼 떠가는 단풍잎을 보라. 사람 마음도 단풍처럼 붉어짐을 느낄 수 있다.
 선녀탕과 용소폭포 주전골 만경대에 가보라. 근처 나무가 화폭(畵幅)인양 산을 칠했다. 사람을 파스텔화 속을 걷게 만든다. 가만히 보면 나무마다 선호하는 색이 있다. 백양나무는 노란빛, 옻나무는 붉은 빛, 굴참나무는 갈색 톤이다. 은행나무 낙엽은 오십대 여인의 미소처럼 은은하고, 벗나무 단풍은 깊은 밤  삼십대 카폐 여인 루즈처럼 짙다. 나무가 모두 화가이다.


 그 다음은 물을 보라. 어성전 법수치리 면옥치리 현리를 아는가. 속초는 청옥의 물빛이 자랑이다. 물이 그처럼 깨끗할 수 없다. 옥류는 바위 만나면 바이올린 현처럼 부드럽게 구비치고, 폭포 만나면 은구슬처럼 깨어지고, 들판에서는 흰구름 비친 투명 거울이 된다. 봄물은 시적이고, 가을물은 사색적이다.

 

'두 사람이 술잔을 대하니, 산꽃이 피네. 한잔 들게 한잔 들게 또한잔 들게.
나는 취하여 잠을 자려하니 그대는 잠깐 돌아갔다가, 내일 아침 생각나면 거문고 안고 오라' 

 

골짜기 가득한 벛꽃이 물에 뜨 흐르는 면옥치 봄은 이태백의 '산중대작(山中對酌)' 생각나게 한다.

 


 투명 크리스탈 잔에 담고싶은 현리의 물은 얼음처럼 찬 수면 위로 노랑과 주홍 단풍 비단무뉘 수놓으며 흐른다. 간혹 피라미가 황혼의 수면에서 튀어오르면 문득 보들레르의 '가을의 쏘넷' 한구절 툭 떠오른다. 

 최상의 물빛을 본 후라야 물소릴 논할 수 있다. 선림원 폐허의 석등(石燈)과 삼층석탑 위로 초생달 뜬 밤, 구룡령 물소리 혼자 들어보라. 이곳 물소리 들으러 오던 한 숙녀가 있었다. 아! 그러나 물소리 가슴에 울리고, 남대천 뚜거리탕 아직도 따끈하건만, 그때 잔 건네던 그녀의 흰 손은 보이지 않는다. 

 설경의 멋을 알려면 속초로 가라. 눈이 하지에 녹는다고 설악(雪嶽)이요, 바위가 눈처럼 희다고 설악이다. 산 아래 단풍이 한창일 때, 은백 봉우리가 청화백자처럼 은은한 하늘을 인 모습 설악만 간직한 비경이다. 눈은  노송과 고사목(枯死木)과 청댓잎을 더 격조있게 만든다. 

 설악의 인적없는 설원(雪原)은 어디던가? 용대리 산림욕장에 혼자 가보라. 거기 계류의 푸른 결빙 위에 찍힌 육각 보석같은 눈의 결정을, 낙엽교목  숲 설화(雪花)의 궁전에 무시로 지나가는 안개를, 미답(未踏)의 설야(雪野)에 흩어지는 눈바람을 보라. 
 녹차 한 잔 마시며 호반의 눈내리는 풍경 보기엔 영랑호가 제일이다. 지붕까지 쌓인 눈에 반쯤 묻힌 집, 푸른 사철나무 울타리 붉은 열매 맺힌 모습, 영랑호의 서정이다. 매화 가지 너머 신선봉 미시령 황철봉 대청봉 보라빛 연봉 사이로 가장 장관인 것은 하늘로 치솟은 토왕성빙폭(氷瀑)이고, 낮엔 아껴두었다가 달 아래 볼 곳은 기암(奇巖) 울산바위 설경이다. 

 

 안개는 잊혀진 시간 떠오르는 하얀 커텐인가. '아야진' 커피숍 창가로 가보라. 안개가 선박의 마스트 가리고, 허공을 가리고, 희미한 먼 바다의 등불 가리고, 추억을 가린다. 낮선 이국 홀로 헤매는 정취 일으킨다. 한치 앞 분간하기 힘든 해무(海霧) 덮힌 미시령고개, 늦가을 홍시 달린 감나무 비치는 장산리 공항 푸른 써치라이트, 수산에서 들어가는 여운포 밤바다 드라이브 길 오징어잡이 푸른 어화(漁火)가 끝없이 신비로운 것은, 속초에 수시로 안개 짙은 밤이 오기 때문이다.  

 

 신(神)이 살던 정원의 폐허련가. 속초는 처처에 꽃이 피어있다. 향냄새 젖은 낙산사 홍련암 뜰 붉은 해당화, 필레약수 자주빛 금낭화, 비룡폭포 오르는 난간 푸른 금강초롱, 미시령 눈밭 보라빛 얼러지꽃, 대청봉의 하얀 에델바이스, 하일라밸리 보라빛 난쟁이붓꽃, 알프스 3번 파브릭코스 오르는 전동차 범퍼 위로 덮히던 분홍빛  코스모스, 도원저수지 옆 초등학교 교정의 밤 벛꽃, 그밖에 푸른 용담꽃, 하얀 구절초, 노란 삼지구엽초와 매발톱꽃, 자주빛 꽃창포 등 기화요초(琪花瑤草)가 자생한다. 송이 향기만 말하지 말라. 야생 꽃향기가 송이보다 향기롭다. 향수(香水)도 오히려 부끄럽다. 속초는 꽃도 여승처럼 기품있는 향기를 지녔기 때문이다.

 

 속초는 실낙원(失樂園)이다. 실낙원은 슬품이던가. 만약 그대가 속초에 가신다면...  푸른 파도 밀려오는 피안(彼岸)의 땅 어디에서, 문득 가날프게 들려오는 쏠베지송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문학시대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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