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전편

전원일기/수지에서(17)

김현거사 2017. 10. 11. 15:14

전원일기/수지에서(17)

 2005년 9월

 

 가을 장미

 

 

 선풍기와 에어켠 찾다가 어느날 문득 홑이불 찾으면 가을이다. 아침 외출시 긴소매 찾으면 가을이다. 9월은 본격 단풍철 아니다. 그러나 가을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산책길의 개울 물소리 쓸쓸해지고, 풀섶의 풀벌레 소리 가슴에 닿는다. 9월은 여름이 끝났음을 선언하는 매정한 여인이다. 

 그 9월이 오면 꽃이 달라진다. 더 곱고 청초하고 애처러워 진다. 꽃이 이별을 말하고  돌아선 여인의 뒤태 같다. 시들어가는 봉선화는 지난 여름을 그립게 만든다. 이슬 맺힌 칸나는 가을을 더 애잔하게 한다.

 

 

 

 어디서 9월의 노래가 들리는듯 하다. <9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꽃잎이 피는 소리 꽃잎이 지는 소리. 가로수의 나뭇잎은 무성해도 우리들의 마음엔 낙엽이 지고, 쓸쓸한 거리를 지나노라면 어디선가 부르는 듯 당신 생각 뿐 ...>

 9월은 사람을 외롭게 하는 달이다. 여름이 추억되는 달이다. 9월이 오면 코스모스와 들국화가 피지만, 우리를 어딘가 철새처럼 먼 하늘가로 떠돌게하고, 가로수길 밟고 쓸쓸한 거리를  한없이 걷게 만드는 꽃은 따로 있다. 장미다. 청초하고 고운 여름의 마지막 장미는 마치 떠나간 여인 같다. 장미는 철 지난 쓸쓸함으로 우릴 가슴 아프게 한다. 장미는 아름다워 더욱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장미는 여름의 끝을 선언하는 매정한 여인이다.

 

 

2005년 10월

추석 다음 날 새벽 산에 올라가니 인적은 고요한데 웬 노인 한 분이 있다. 궛볼이 아래로 축 늘어지고 입술은 여인처럼 붉고, 살결은 어린애처럼 부드러운 모습이 천상 신선 같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인사 던지니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아는 체 하지 않는다. 주변엔 고요한 물소리와 새소리만 들린다.

 

 물통에 약수 받으며, 이 물이 산속의 온갖 나무뿌리 풀뿌리, 흙속의 약성분을 머금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은나라 팽조(彭祖)는 계피와 영지를 먹으며 8백세를 살았고, 하나라 무광(務光)은 창포와 부추뿌리 먹고 상보산에서 노닐었다고 '열선전'에 적혀있다.

 나도 가능하면 고량진미 피하고 생강,부추, 곰취, 참나물을 찾아먹으려고 생각하고 있다.

 

2005년 10월

광교산(光敎山)에서 한시 하나 얻었다.

 

秋雨遠山斜 水流靑苔下 (가을비 먼 산 비껴가고 물은 푸른 이끼 아래 흘러가는데)

寒天落木嘯 白雲歸無路  (찬 하늘 빈 가지 휘파람 불고 흰구름 길 없는 길 간다)

深林人不知 誰聽山鳥涕  (깊은 숲은 사람들 모르지만 누가 듣는가 산새의 울음소리)

世路不少人 松下寂無人  (세상길에는 사람들 많지만 소나무 아래는 사람이 없네)

 

비온 뒤 이끼 더 푸르고, 물과 구름은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길이 길 없는 길 아니던가. 알 수 없는 우리 인생길 같다.

 

2005년 10월

집에서 백운스님의 선시(禪詩) 읽다가 흥이 일어 한시 하나 다듬어 보았다.

 

門外靑山畵已成  天中白雲書行草 

(문 밖 청산은 이미 그림 완성했고, 하늘의 흰구름 행서 초서를 쓰고있다)

山家水聲無絃琴  何求達磨西來意

(산가의 물소리는 줄 없는 거문고인데 어찌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구하겠는가)

 

문 밖의 청산은 그림을 그린듯 아름답고, 흰구름은 하늘에다 행서 초서를 쓰고있다. 세상 벗어난 그림과 글씨 보면서, 또 산속의 초막 옆 물소리는 줄 없는 거문고 소리를 내는데, 여기 불교의 뜻이 다 들어있으니, 어찌 다시 불교를 전해준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구하겠는가 하는 의미다.

 

 2005년 10월

가을뜰에 앉아 상량한 가을공기를 싫컷 마셔보았다. 돌 위에 앉은 이끼가 하도 푸르고 싱싱해, 그 위에 떨어지는 꽃잎이 더 애처롭다. 아른아른 낙하하는 꽃잎이 계절을 더 실감케 한다. 싸늘해진 뜰에 핀 장미와 칸나는 이제는 철 지난 초로(初老)의 여배우를 연상시킨다. 농염하고 애잔하다. 붉은 꽃잎에 불타던 여름의 추억이 서려있다.

가을바람에 우수수 흔들리는 복자기 나무잎은 붉으작작 물들었고, 은행잎은 황금빛, 단풍은 초지일관 홍엽(紅葉)이다. 노란 모과, 주홍빛 대봉시(枾)가 고향 생각 일으킨다. 청곡사(靑谷寺) 가던 길 들국화 냄새, 황금빛 나락 익어가던 들판 생각난다. 거기 핀 코스모스처럼 청초하던 문산초등학교 여선생은 지금 어디 살고 있을까. 팔랑팔랑 하얀 나비 한마리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

 어제밤은 뜰에서 늦도록 초생달 지켜보았다. '짚씨의 탱고'처럼 파리한 달빛, 그 밤 나는 애잔한 가을꽃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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