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 '화개동천(花開洞天)'이 있다. 섬진강과 지리산 주능선 사이의 신령스러운 골짜기이다.'화개동천'이란 꽃이 피고 신선이 사는, 하늘과 잇닿은 곳이란 뜻이다. '화개'란 이름은 쌍계사의 전신 옥천사(玉泉寺)의 창건 설화에서 유래한다. 고승 삼법화상이 당나라에서 육조 혜능의 정상을 봉안해 올 때 눈 위에 꽃이 피는 곳에 안치하라는 몽수를 받았다. 그가 강주(진주)에 도착하니 지리산 호랑이가 마중을 나와 인도를 했다. 그 호랑이를 따라가니 눈 덮인 곳에 칡꽃이 만발해 있었다. 그곳에 절을 세워 옥천사라 했다는 것이다.
겨울에도 칡꽃이 핀다고 하여 화개란 이름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신선이 살고 있고 하늘과 잇닿아 있다는 '동천'이란 왜 붙여졌는가? 지리산에는 전설적인 유토피아, 곧 이상향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어왔다. 난리를 피하고, 먹을 것이 많고, 무병장수하는 별유천지, 곧 '청학동(靑鶴洞)'이 존재한다는 것이 '정감록' 등의 문헌과 수많은 시인묵객, 은둔거사들의 기록과 행적, 전설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고려 무신정권 시대에 잠시 벼슬 자리에 올랐던 이인로(李仁老, 1152~1220)는 자신의 저서 '파한집(破閑集)'에 청학동이 다음과 같다고 썼다.
'지리산 속에 청학동이 있다. 그 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주 좁아서 사람도 겨우 지나갈 정도다. 기어서 가다시피하여 수십리 쯤 들어가야 비로소 아주 넓은 곳에 다다른다. 주위는 모두 기름진 밭과 땅으로서 씨 뿌리고 농사 짓기에 알맞고, 나무를 심어서 숲이 우거져 그 속에는 푸른 학(청학, 靑鶴)이 서식하고 있어서 '청학동'이라고 부른다.'
이인로는 실제로 청학동을 찾기 위해 소 두 필에 죽롱을 싣고 지리산으로 찾아왔다. 그가 청학동으로 믿고 발길을 들여놓은 곳이 바로 화개천을 거슬러오르는 화개동천이었다.
'지나는 곳마다 선경이 아닌 곳이 없었다. 천암이 다투어서 솟아있고, 온갖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소리내어 흐른다. 대나무 울타리에 때를 입힌 집들이 복숭아꽃, 살구꽃에 어리어 정말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듯하다.'
그이는 신흥사(현재의 신흥부락)에 묵으며 화개동천 일대에서 청학동을 찾아다녔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지팡이를 짚고 청학동을 찾으려 하나 건너편 숲속에선 원숭이 울음소리만 들리네...묻노니 청학동이 어디메뇨, 꽃잎만 어지럽게 흘러 사람만 어지럽히노나.' 그는 이런 글을 새겨놓고 지리산을 떠나갔다.
지리산에는 청학동 못지 않게 '삼신동(三神洞)'의 개념이 강하게 퍼져 있다. 삼신동과 청학동은 그 개념이 비슷하면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정감록'은 '청학동에 살면 무병장수하고 죽으면 신선이 된다'고 썼다. 삼신동은 청학이 살고 있다는 것은 같지만, '살아서도 신선이 되어 영생한다'고 하였다. 청학동은 현실적인 집단의 이상향이요, 삼신동은 미학적인 개인의 이상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지리산에 삼신동의 개념을 심은 것은 신라말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이다. 그가 화개동천에 '三神洞'(삼신동)이란 각자(刻字)를 남긴 것이다. 최치원은 지금의 신흥동 신흥교 바로 옆 큰 바위에 '삼신동'이란 글자를 새겨놓고, 불일폭포에서 푸른 학과 노닐면서 학연(鶴淵)에서 신선이 되어 지금까지 영생하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의 대학자들인 김일손, 조식 등은 불일폭포를 청학동으로 이해하고 있다. 조식은 지리산 기행록인 '유두류록'에서 청학 두서너 마리가 불일폭포 위에서 노닐고 있다면서 '그 아래 학연이 있는데 어두컴컴하여 밑간 데를 모르겠다...그 속에 신선들과 큰 신령과 긴 이무기와 거북이 숨어 살면서 만고토록 수호하며...'라 썼다.
조식은 또 '어느 사람이 나무를 베어 사다리를 세우고 겨우 입구에 들어가서 이끼 낀 돌 하나를 주워서 보니 '三神洞'(삼신동)이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화개동천의 삼신동은 현재의 신흥동과 불일폭포 두 곳에 존재하는 셈이다.
최화수의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