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의사 타진
<책 한 권에 소개한 동양사상 50편>
머리글
책은 많지만 고전은 드물다. 동양 고전은 더 드물다. 사람들은 일리야드 오딧세이는 읽었다고 자랑하지만, 공자 맹자나, 퇴계 율곡은 제대로 읽은 사람 드물다.
필자가 기업에서 근무할 때 이야기다. 유럽 어떤 왕족과의 만찬 테이불에서다.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던 중역이 그쪽 귀부인이 테이불에 놓인 태극기의 빨강과 파랑의 의미를 묻자,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는 걸 본 적 있다. 태극(太極)의 의미를 몰랐던 것이다. 그 후 필자는 그룹 사보에 공맹, 노장, 퇴율 등 동양사상을 20여년간 칼럼으로 쓴 적 있다.
그러나 학문의 세계란 바다처럼 깊고 산처럼 높은 것이다. 퇴계선생 하나만 가지고도 일평생 연구해도 못하는게 학문의 세계다. 그런 사상을 어떻게 원고지 몇 장 칼럼으로 다이제스트 할 수 있는가? 알기 쉽게 간략히 소개하겠다는 의도야 좋지만, 만용에 가까운 행동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은 17세기 남경의 부호였던 이립옹(李笠翁)이라는 부호는 이전의 유명한 동양화 그림과 이론을 판각하여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이란 책을 만들었다. 그가 그 일을 진행하던 중 타계하자, 사위 심심우(沈心友)가 이어받아 22년에 걸쳐 책을 완성했다. 이 책이 지금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동양화의 교본이다.
필자는 은퇴하여 시간을 얻자 이립옹을 본받기로 결심하였다. '책 한권에 소개한 동양사상 50편'이란 제목을 정하고, 한국과 중국 각 25편을 다이제스트한 단행본을 만들기로 했다.
다행히 필자는 젊은 시절 저날리스트 였고,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일단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염두에 두고 기존 원고를 정리하고, 시각적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을 첨가했다.
요즘 우리는 드라마와 춤과 노래는 한류라 해서 세계에 알려지고 있다. 한류 뿐이랴. 지금 우리는 메모리 반도체, 액화천연가스 운반선, 등 세계 일등 상품을 127개나 수출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5천년 유구한 역사와 철학을 가진 민족임을 알려야 할 차례다.
현재 시중에는 우리 사상을 소개한 책이 드물다. 있다해도 학자들은 공자면 공자, 퇴계면 퇴계, 단 하나 본인 전공만 연구하기 때문에, 전공서적이고 일반에겐 어렵다. 이런 실정이라 필자는 공부가 짧아 능력이 미치지 못함을 잘 알면서도 이 책을 내놓는다. 부디 이 책이 젊은 세대에게 우리 사상을 간략히 맛보이게 해주는 맛소금이 되길 기대한다.
목차
한국편(상권)
최치원. <토황소격문>. <계원필경집>. <진감선사 비명>.
번뇌는 한량 없고 깨달음의 길은 멀어/ 원효.<발심수행장>
간밤에 꿈 꾼 사랑/ 일연 <삼국유사>
구름 낀 숲에 사는 한 선비/ 화담 서경덕
눈 속에 소를 타고 친구 찾아가며/ 율곡 이이
도산십이곡/ 퇴계 이황
단성현감 사직소/ 남명 조식
귀양살이 19년에 509권 책을 지어/ 다산 정약용
달은 천강에 비치고/ 세종대왕. <월인천강지곡>
우리나라 무예는 무엇인가/ 정조. <무예도보통지>
우리나라 최초의 꽃가꾸기 지침서/ 강희안. <양화소록>
농촌생활의 백과사전/ 홍만선. <산림경제>
김시습/ <만복사 저포기>
은둔하여 사는 멋/ 신흠. <야언선>
사대부가 살만한 터는 어디인가/ 이중환. <택리지>
차란 무엇인가/ 초의스님. <동다송>. <차신전>
동양 3국의 초 베스트셀러/ 허준. <동의보감>
우리나라의 예언서들/ <정역>. <격암유록>. <정감록>
토정비결은 무엇인가/ 이지함. <토정비결>
선시 소개/ 원효. 원광. 혜초. 대각. 진각. 보각. 원감.
선시 소개/ 태고. 나옹. 함허.
선시 소개/ 보우. 서산.
선시 소개/ 경허. 만해.
선시 소개/ 영호. 구하. 만공.
선시 소개/ 한암. 효봉. 경봉.
*원고 샘풀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퇴계(退溪) 이황(李滉)
퇴계 이황
동방 유학의 성사(聖師)라고 불리는 이황(李滉, 1502-1571)의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叟), 청량산인(淸凉山人)다. 제자는 동인 당수였던 김효원과 유성룡, 김성일이 있다. <주자서절요>, <사단칠정분리기서>, <성학십도>, <자성록>, <퇴계집>이 남아있고 <도산십이곡> 시도 남겼다.
그가 기대승(奇大升)이라는 학자와 전개한 사단칠정(四端七情)의 학설,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發)한 것이요, 칠정(七情)을 기(氣)가 발(發)한 것이다(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라는 이 12자의 결론은, 조선 성리학의 하이라이트다.
그의 시서(詩書)와 행적을 살펴본다.
행적을 보면, 김성일(金誠一)은,
'선생님의 거처 주위는 항상 정숙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책상은 반드시 밝고 깨끗했다. 도서가 가득 차 있었으나 언제나 흐트러진 책이 없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향을 피우고 정좌하셨고, 종일 책을 보아도 나태한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으셨다.'
하였고, 이덕홍(李德弘)은,
'선생께서 전에 월란사(月瀾寺)에 계실 때 어떤 사람이 낙지를 보내오자, 이웃 노인들에게 나누어 보내고는 비로소 맛을 보셨다. 선생께서는 제사나 시향(時享)에는 아무리 춥고 더운 때라도 병 들어 눕지 않은 한 반드시 친히 가서 제물을 바쳤으며, 남에게 시키지 않으셨다. 또 선생은 새로운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종가(宗家)에 보내어 사당에 올리게 하셨다.'
고 말했다. 또 이안도(李安道)는,
'선생께서 풍기 군수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갈 때의 행장은 홀가분했으며, 책 몇 짐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집에 가자, 그 책을 담았던 나무 상자들을 관졸들에게 부쳐 도로 돌려주었다.'
하였다.
*이런 퇴계의 청렴한 군자의 기상은 그가 36세 때 쓴 <연말에 고향 편지를 받고>와 <봄철에> 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연말에 고향 편지를 받고
고향에서 보내 온 편지 열 장 남짓, 글자마다 넘치는 친구의 사연. 새벽에 일어나 펼쳐보며, 읽고 또 읽고 되풀이해 읽어본다.
고향 어른 평안타 함이 어찌 기쁘지 않으리요만, 이 곳 나의 심정은 더욱 우울해지네. 돌이켜보니, 내 어머님 곁을 떠나 객지에서 찬바람 부는 중양절(重陽節)을 몇번이나 보냈는가.
서울 와서 한 일 없이, 관리가 되어 공무에 쫒기는 몸, 어머님 병환 걱정할 틈도 없었네. 세월은 빨라 벌써 연말 그믐은 닥쳐오는데, 객지 베갯머리에 근심만 많고, 마음은 먼 고향으로 달리네.
돌이켜보면, 재주 없고 부끄럽기만 한 이내 몸, 나라에 보답도 못하거늘, 어찌 일찍이 맘 편하게 거두어 가난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고. 내 힘으로 농사 지어 어른께 올리고, 어머님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바로 내 분수에 맞거늘, 오래 망설이며 결단을 못하고는 뻔뻔하게 명리(名利) 덤불 속에서 헛되게 넋을 잃고 있는가.
술미치광이라도 되고싶으나 그 비결을 배울 수 없구나. 살림 군색하여 떨어진 옷도 전당 잡혀야 하고, 쌀독에는 약식이 떨어질 지경이니, 벼슬살이 열번이고 사직하고서, 고향에 가고픈 맘 끝이 없어라.
관록(官祿)엔 뜻이 멀고, 물질을 바라지 않지만, 아이들은 내 뜻을 어찌 알리요. 까닭없이 과일 달라고 졸라만 대네.
책상 앞에 벼루와 붓이 있어, 이렇게 읊조리며 써 보네.
*이 시는 선생의 부친 찬성공(贊成公)이 선생이 출생한지 일곱 달 만에 별세하여, 32세로 과수가 된 모친 박씨가 넉넉치 못한 살림 속에서 막내인 퇴계를 비롯하여 8남매를 어렵게 키운 점을 생각하면, 제대로 이해될 것이다.
봄철에
맑은 봄날 아침, 하릴없이 아무렇게나 옷을 걸치고 서헌(西軒)에 앉으니, 머슴은 뜰을 쓸고 적요하게 문을 도로 닫더라.
세초(細草)는 섬돌에 돋아나고, 아름다운 나무들 뜰에 찼어라. 살구꽃은 비에 떨어진듯, 복숭아꽃은 밤새 더욱 피어난듯. 붉은 벚꽃잎은 눈처럼 휘날리고, 흰 오얏꽃은 은빛 바다인양 출렁이며. 새들은 저마다 자랑하듯 새벽에 요란하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고 흐르니, 말 못할 가슴 속 회포여.3년 여 서울생활, 멍에 맨 망아지 신세, 덧없이 아침 저녁으로 나라에 부끄럽구나.
나의 고향 물 맑은 낙동강 기슭, 한적하고 평화로운 마을, 이웃에서 봄 농사하면 닭과 개가 울타리를 지켜주네. 책이 놓인 청정한 책상머리 내다보이는 강과 들은 봄안개에 아롱거리며, 시냇가에는 물고기와 새들이 날고, 소나무 그늘에 학이 노닌다.
시골의 즐거움이여, 나도 귀거래사(歸去來辭) 읊으며 돌아가 조용히 술잔이나 들고져.
*퇴계는 27세에 향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28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했지만, 정작 과거에 급제한 것은 34세 였다. 그렇게 늦게 벼슬살이 들어가 16년간 몸 담았다가 50세에 퇴계라는 곳에 은퇴하였다. 그곳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독서와 사색에 잠기며 후진 양성을 하였는데, 명종은 그가 출사를 계속 거절하자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어 풍경을 그려오게 하여 완상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송인(宋寅)이란 사람을 시켜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은 병풍을 만들게 하여, 그걸 보며선생을 흠모했다고 한다.
한서암(寒棲庵)
맑은 시내 서쪽에 초막을 지었으니, 속객이 어찌 사립문 두드리고 찾아오리.
산 남쪽에 은퇴해 계신 노선백(老仙伯, 李賢輔를 말함)께서 만발한 꽃을 누비며 견여(肩輿) 타고 오시었네.
한서(寒棲)
띠풀 엮어 숲속에 초막 세우나니, 집 아래로는 차가운 샘물 넘치누나.
늦게 들어 살지만 족히 즐겁고, 사람 없이도 한 되지 않더라.
어부(漁夫)
산협(山峽)의 강에는 풍파가 일어 끝없이 차거운데, 일엽편주를 푸른 물굽이에 묶어, 생생한 고기를 잡아 서행객(西行客, 서울 가는 손님)에게 팔아넘기고, 웃으며 구름안개 자욱한 속으로 사라지더라.
소나무를 읊다(詠松)
돌 위에 자란 천년 묵은 불로송, 검푸른 비늘같이 쭈굴쭈굴한 껍질, 마치 날아 뛰는 용의 기세로다.
밑이 안 보이는 끝없는 절벽 위에 우뚝 자라난 소나무, 높은 하늘 쓸어낼 듯, 험준한 산봉을 찍어 누를 듯.
본성이 원래 울긋불긋 사치를 좋아하지 않으니, 도리(桃李) 제멋대로 아양떨게 내버려 두며, 뿌리 깊이 현무신(玄武神, 북쪽을 지키는 신)의 기골을 키웠으니, 한겨울 눈서리에도 아랑곳없이 지내노라.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럿타 엇더하리.
하물며 천석고황(泉石膏肓)을 억지로 고쳐 무엇하리.
연하(烟霞)로 집을 삼고, 풍월(風月)로 벗을 삼아, 태평성대에 병(病)으로 늙어가니, 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고져.
순박한 풍조는 죽었다 하는 말은 진실로 거짓말이고, 인간 품성이 어질다 하는 말이 진실로 옳은 말이다. 천하에 허다한 영재(英才)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그윽한 난초는 골짜기에 있어(在谷) 자연히 냄새가 좋고, 백운(白雲)이 산에 있어(在山) 자연히 보기 좋구나. 이런 속에 저 한 분 임금님(彼 一美人)을 더욱 잊을 수 없구나.
산전(山前)에 낚시터 있고, 대하(臺下)에 물 이로다. 떼 많은 갈매기는 오명가명 하는데, 어찌하여 저 흰망아지(皎皎白駒)는 멀리 뛰어갈 생각하는가.
춘풍에 꽃이 산에 가득하고, 추야에 달빛이 누대에 가득하니, 사철의 아름다운 감흥 사람과 한가지구나. 하물며 고기 뛰고 솔개 날고(魚躍鳶飛) 구름 그림자 하늘 빛(雲影天光)이야 어디에 끝이 있을고.
천운대(天雲臺) 돌아들어 완락재(玩樂齋) 깨끗한데, 만 권 책 벗 삼은 생애 즐거운 일 무궁하여라. 이 중에 바깥 오가는 풍류 일러 무엇 하겠는가. 천둥소리 산을 무너뜨리어도 귀머거리는 듣지 못하며, 밝은 해가 하늘 높이 솟아도 장님은 못 보는 것이니, 우리는 귀와 눈 밝은(耳目聰明)자로 되어서 귀머거리 장님은 되지 말아야 한다.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옛 성현을 뵙지 못하네. 그러나 옛 성현을 뵙지 못해도, 바른 길 우리 앞에 남아있다. 바른 길 앞에 있으니 행하지 않고 어이 할 것인가. 당시에 행하던 길 몇 해 씩 버려두고, 어디 가 다니다가 이제사 돌아왔는고. 이제라도 돌아왔으니, 딴 마음 두지 않으리.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그치지 않는고. 우리도 그치지말아 만고상청(萬古常靑) 하리라.
어리석은 사내(愚夫)도 알아서 하거니 그 아니 쉬운가. 성인(聖人)도 다하지 못하시니 그 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나 간에 늙은 줄을 모르겠네.
*끝으로 퇴계 선생 하면, 홀로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만났던 18세의 관기(官妓) 두향(杜香)이와의 사랑을 빼놓을 수 없다. 두향은 선생이 풍기군수로 떠나자 매화를 선물했고, 선생은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거쳐 69세에 고향 안동에 돌아와 임종할 때까지 그 매화를 곁에 두고 끔찍이 아꼈다. 임종시에는 '매화에 물을 주라'란 말을 남겼다. 두향은 남한강 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다가, 부음을 접하자, 4일간 걸어서 안동을 방문하고 돌아와, 곡기를 끊고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선생은 91수의 매화시를 담은 매화시첩(梅花詩帖)을 남겼다. 그 중 두 편 소개한다.
其一
一樹庭梅雪滿枝 뜰앞에 매화나무 가지 가득히 눈꽃 피니
風塵湖海夢差池 풍진의 세상살이 꿈마저 어지럽네玉堂坐對春宵月 옥당에 홀로 앉아 봄밤의 달을 마주하니鴻雁聲中有所思 기러기 슬피 울어 생각이 산란하네
其二
黃卷中間對聖賢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虛明一室坐超然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梅窓又見春消息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 다시 보나니莫向瑤琴嘆絶絃 거문고 보고 앉아 줄 끊겼다 한탄마라
중국편(하권)
2700 년 전 시심은 어떤 것인가/ <시경>
요, 순, 우, 탕의 행적을 담은 책/ <서경>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공자. <논어>
호연지기란 무엇인가?/ 맹자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 노자.<도덕경>
도둑에게도 도가 있나이까?/ 장자.<남화경>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것은 중이라 한다/ 자사. <중용>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순자. <성악설>
반야심경/ 현장삼장
도끼 도둑의 걸음걸이/ 열자
겸애란 무엇인가/ 묵자
진시황을 감탄시킨 문장가/ 한비자
신선이란 무엇인가?/ 포박자
무엇이 진정한 다도일까?/ 육우. <다경>
사람의 본래 성품이 곧 부처다/ 혜능. <육조단경>
무경칠서(武經七書) 제1편/ <손자병법>. <오자병법>. <손빈병법>
무경칠서(武經七書) 제2편/ <육도삼략>. <사마법>
무경칠서(武經七書) 제3편/ <율료자>.<당태종이위공문대>
동양화의 육법전서/ 이립옹. <개자원화전>
하늘의 뜻은 헤아리기 어렵다/ 홍자성. <채근담>
굴원/ <어부사>
돌아가리로다/ 도연명. <귀거래사>
술잔 들고 달빛을 마주하니/ 이태백
푸른 물 한굽이 마을을 안고 흐르나니/ 두보
그윽한 대숲에 나홀로 앉아/ 왕유
비파 타는 여인의 노래/ 백낙천. <비파행>
적벽강의 노래/ 소동파. <적벽부>
*원고 샘풀
도둑에게도 도가 있나이까?
장자(莊子)의 남화경(南華經)
예수 뒤에 바울이, 플라톤 뒤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공자 뒤에 맹자가, 노자 뒤에 장자가 있다. 인류 8성현 중에 노자, 장자는 도교(道敎)의 창시자로 꼽힌다.
장자는 '인간은 인간의 작은 지혜에 집착해서 자연의 도를 거역하지말고 순리로 살 것'을 강조한다.
'남화경'은 소요유(逍遙遊), 제물론(齊物論), 양생주(養生主) 등 내편(內篇)과, 병무(騈拇) 등 외편(外篇), 경상초(庚桑楚) 등 잡편(雜篇) 전 3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문장은 대체로 노자의 '도덕경' 보다 더 분명하고 이해하기 쉽다.
33편 가운데 장자가 쓴 것은 내편 7편이고, 외편과 잡편은 후세 사람이 썼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중 제물론(齊物論)은 수학과 과학의 천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와 비슷하다는 학자도 있다.
장자는 기원 전 290년 춘추전국 시대 송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주(周)다. 일개 아전이었으나, 초나라 위왕(威王)이 그 이름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재상을 시키려 하자, 코웃음 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다. 천금은 큰 이득이다. 재상은 훌륭한 지위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그대는 제사에 희생되는 소를 보았는가? 수년간 잘 먹이지만 결국 태묘(太廟)에 끌려가지 않을 수 없고, 그 때 가서는 소 같은 큰 짐승보다 살아있는 돼지라도 되었으면 하고 소원해도 쓸데없다. 그대가 나를 초빙함은 이와 같으니 빨리 가라. 일생을 속박되지 않고 벼슬 없이 살련다.'
'소요유(逍遙遊)'의 '대붕도남(大鵬圖南)' 편
북녘 바다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살고 있는데, 그 크기가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붕(鵬)이라는 새가 된다. 그 등 넓이는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고,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을 덮는 검은 구름 같다. 이 새는 바다에 큰 바람이 이는 계절이 오면 천지(天池)라는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물이 깊지 않으면 배를 띄울 수 없다. 한 잔의 물이 마루에 괴면 작은 풀잎은 배처럼 뜰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잔을 올려놓으면 바닥에 닿고 만다.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것도 이와 같다. 바람이 두껍게 쌓이지 않으면 날개를 띄워 올릴 힘을 얻을 수 없다. 9만 리 높은 하늘에 올라야만 붕의 날개가 바람의 힘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붕은 바람을 타고 날아올라 푸른 하늘을 등지고 자유롭게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매미와 비둘기가 붕을 비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공중으로 날라 갈대밭을 빙빙 돌다가 내릴 줄 안다. 이만하면 날 만큼 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9만 리 먼 하늘까지 올라가 남쪽으로 가려 하는가?'
교외로 소풍을 나가면 하루 세 끼만 있으면 충분하지만, 백 리 길을 가려면 하룻밤 곡식을 찧어야 하고, 천 리 길을 가려면 세 달 동안 식량을 모아야 한다. 조그만 날짐승이 대붕의 비상을 어찌 알랴.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수명은 긴 수명에 미치지 못한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녂에 지는 조균(朝菌)이라는 버섯은 밤과 새벽을 모르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둘 다 살아있는 기간이 짧기 때문이다.
'제물론(齊物論)'의 '조삼모사(朝三暮四)' 편
장자의 '제물론'은 만물을 고르게 하는 논리라는 뜻이다. 모든 것은 상대성을 지닌다. 시시비비를 초월하여 모든 사물을 평등하게 바라보라는 뜻 이다. 유일 절대의 도의 입장에서 현실 세계의 갖가지 현상, 시비 선악, 미추, 정사, 화복, 길흉, 생사등을 명확히 구분하는 상대적 가치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가를 밝히고 있다.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또 이것 아닌 것도 없다. 이쪽에서 보면 모두가 저것, 저쪽에서 보면 모두가 이것이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삶이 있다. 한쪽에서의 분산은 다른쪽에서의 완성이며, 한쪽에서의 완성은 다른 쪽에서의 파괴이다. 사물은 완성이건 파괴건 다같이 하나이다. 이처럼 세상 일은 모두 상대적이므로, 성인은 그런 방법에 의하지 않고, 그것을 절대적인 자연의 조명에 비추어 본다. 커다란 긍정의 세계에 의존한다.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에 불과하다. 내 손가락으로 저 사람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저 사람 손가락으로 내 손가락이 자기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이것이 저것이고 저것 또한 이것이다, 저것과 이것, 그 대립을 없애버린 경지를 '도추(道樞)'라고 한다.
조련사가 어느 날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아침에는 3개, 저녁에는 4개를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가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래서 말을 바꾸었다. '미안, 그러면 아침에 4개, 저녁에는 3개를 주지.' 그러자 원숭이는 좋아했다. 실제는 아무 차이가 없는데도 노여움과 기쁨이 일어난다. 이것은 마음이 시비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시비의 구별을 세우지 않고, 모든 것을 ‘천균(天鈞)’(자연 평등의 이치)에 맡긴다. 이것을 ‘양행(兩行)’(사물과 내가 서로 어울림)이라 한다.
'양생주(養生主)'의 '포정해우(庖丁解牛)' 편
유명한 요리사 포정(庖丁)이 위(魏)나라 혜왕(惠王) 앞에서 소 한 마리를 잡았다. 포정이 소를 손으로 잡고, 어깨에 힘을 넣어 발의 위치를 잡으며 무릎으로 소를 누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고기와 뼈가 깨끗이 발라졌다. 리듬을 탄 칼질소리는 마치 ‘상림무(桑林舞)’(은나라 탕왕이 즐기던 무곡)나 ‘경수회(經首會)’(요임금이 즐기던 무곡)처럼 들렸다.'참으로 신기하도다!' 혜왕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발했다. 포정은 그 말을 듣고 혜왕을 바라보며 말했다.'황공하오나 이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기술이 극에 이르면 도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란 모두 소뿐이었으나, 3년이 지나자 소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이르렀습니다. 요즘 저는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소를 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감각이 멈추고 마음만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를 뿐입니다. 소의 몸에 자연스레 나 있는 틈을 따라 칼질을 하므로 커다란 뼈는 물론이고 근육이나 살이 마구 얽힌 부분이라도 하나 흐트러짐 없이 발라낼 수 있습니다.
보통 요리사는 한달에 한번 칼을 바꾸고, 솜씨 있는 요리사는 1년에 한번 칼을 바꿉니다. 칼날은 오래 사용하면 뼈에 부딪쳐 날이 빠지거나 무디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칼은 19년이나 사용하여 벌써 수천 마리 소를 발랐지만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지 않습니까?
저는 근육과 뼈가 얽힌 어려운 부분에 이르러, 눈을 한 점에 집중하면, 동작은 자연스럽게 느려지고, 칼이 움직이는지 안 움직이는지 모를 지경에 이릅니다. 이윽고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살점이 흙덩어리처럼 뼈에서 떨어집니다. 이 말을 듣고 혜왕은 감동하여 말했다. '정말 훌륭하구나. 포정은 양생(養生)의 이치를 터득했다.'
'인간세(人間世)'의 '무용(無用)의 용(用)' 편
목수 석(石)이 제나라를 여행하다가 곡원(曲轅)이라는 곳에 이르러 토지신을 모신 사당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릴 수 있을 만큼 크고, 굵기는 백 아름이나 되며, 그 높이는 산을 내려다볼 정도였다.
배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큰 가지만 해도 수십 개가 되었다. 그 주위에 구경꾼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으나 목수 석은 본 척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러자 제자가 석에게 물었다.'제가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다닌 이래로 이렇게 훌륭한 나무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석이 대답했다.'저 나무는 아무 쓸모가 없다. 배를 만들면 그냥 가라앉을 테고, 널을 짜면 금방 썩을 것이고, 그릇을 만들면 곧 망가질 것이고, 문을 만들면 진이 흐를 테고, 기둥을 만들면 좀이 쓸 게야. 그러니 저건 재목으로 쓸데가 없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저렇게 오래 살 수 있는 게야.' 목수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 그 상수리나무가 꿈에 나타나 말했다.'너는 도대체 나를 어디다 비교해서 쓸모없는 나무라 하느냐? 필시 인간에게 유용한 나무에 비교했을 테지. 하기야 배, 귤, 유자 같은 나무는 열매가 익으면 사람들이 따 먹고, 그러다 보면 가지도 부러질 테지.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어질 것이야. 결국 그 나무는 맛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삶이 괴롭고, 그러니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도중에 죽어 버리지. 스스로 세속의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야.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오늘날까지 오로지 아무 소용이 없는 존재이기를 바라며 살아왔고, 이제 천수를 마감하려는 때에 이르러 마침내 아무 쓸모 없는 나무가 되었다. 너희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내게는 정말 소중한 것이니, 만일 내가 쓸모 있는 나무였다면 벌써 베어졌을 것이야. 너와 나는 자연계의 사소한 현상에 지나지 않아. 한 물건이 다른 물건의 가치를 정해서 대체 뭘 하겠다는 건가? 너처럼 쓸모 있는 존재이고 싶어 스스로의 생명을 갉아먹는 자야말로 실제로는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야. 그런 쓸모없는 인간이 나처럼 쓸모없는 나무의 진가를 알아볼 리 없지.'
'지식'의 상대성에 관한 글
사람이 무엇에 대해서 안다고 하지만, 소위 내가 안다는 것은 참으로 아는 것인가? 사람은 생명에 한도가 있으니, 한도가 없는 것을 한도가 있는 생명으로 쫒아감은 위태로우며, 무엇을 참으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태로운 것이다.
사람은 습한 곳에서 자면 요통이 생겨 죽는다. 그러나 미꾸라지는 어떤가? 사람은 나무 위에 살면 불안하고 신경이 고통스럽다. 그러나 원숭이는 어떤가? 사람, 미꾸라지, 원숭이의 거처 중에서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가?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올빼미와 까마귀는 쥐를 먹는다.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구미를 가졌는가? 사람은 미인을 사모하는데, 물고기는 미인을 보면 물 속 깊이 도망가고, 새는 공중으로 날라가고, 사슴은 도망간다. 어떤 것이 올바른 미의 표준이라고 하겠는가?
나는 꿈에 나비가 되어 이리저리 날라다니니 어디로 보나 나비였다. 나는 내가 나비인 줄로 알고 기뻐했고, 장자인 것을 알지 못했다. 곧 나는 깨어났고, 다시 장자가 되었다. 지금 나는 사람으로써 나비 꿈을 꾸었는지, 나비인데 사람이라고 꿈을 꾸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과 나비 사이엔 반드시 구별이 있다.
도둑이 상자를 열고 꿰짝의 재물을 훔치려는 것을 막으려면, 상자를 노끈으로 단단히 묶고 자물쇠를 잠그면 된다. 그러나 강한 도둑은 돈궤와 상자를 몽땅 어깨에 메고 도망한다. 도둑은 동여맨 노끈이 약해서 끊어질까 염려할 뿐 이다. 그러니 세상의 지식이라는 것은, 강한 도둑이 들고 가기 좋게 한 것 밖에 더 되는가? 도둑에게 편의를 보아준 것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도척(盜跖)의 제자가 '도둑에게도 도가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무엇에나 도가 없을 것인가? 방 안에 감춰둔 물건을 알아맞히는 것은 성(聖)이요, 먼저 들어가는 것은 용기요, 뒤에 나오는 것은 의리다. 성공할 것을 예상함은 지(知)요, 장물을 고루 나누는 것은 인(仁) 이다. 이 다섯가지를 갖추지 않고 능히 큰 도둑이 된 자는 천하에 없었다.‘ 하였다.
활이나 그물에 대한 지식이 늘면 공중의 새들이 괴롭고, 낚시와 그물에 대한 지식이 늘면 물 속의 고기들이 불안하다. 함정과 덫에 대한 지식이 늘면 들짐승이 괴롭고, 교활과 거짓 말솜씨가 늘면 세상이 어지러워 진다. 임금이 지식을 갈망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나라는 혼란에 빠진다.
그래서 노자는 '큰 재주는 오히려 졸(拙)해 보인다' 하였다. 단순하고 덤덤한 것을 제쳐놓고, 보기 좋고 간사한 것을 좋아하면 세상이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욕심
장자는 언젠가 조릉(彫陵)이라는 곳에서, 이상한 까치가 자기 이마를 스칠 정도로 낮게 날아서 밤나무 숲으로 가는 것을 보고, 활로 그 까치를 잡으려고 급히 따라갔다.
그런데 가서보니, 그 까치는 장자가 자기를 잡으려고 하는 줄 모르고 숲속의 버마재비를 잡으려고 정신없이 날라간 것인데, 막상 버마재비는 까치가 자기를 잡으려고 하는 줄 모르고, 나무 그늘에 쉬고있는 매미를 잡으려고 집중하여 자신을 잊고 있었다.
장자는 이를 보고 깜짝 놀랬다. '모든 것은 이(利)와 해(害) 두가지를 서로 부르고 있으니, 욕심이라는 것이 두렵다.' 하고 활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런데 이때 숲의 밤나무를 지키던 사내는, 장자가 밤을 따러 온 도둑으로 오해하여 따라오며 욕을 했다. 집에 돌아온 장자는 자기도 까치를 잡으려는 욕심에 집착하여 밤 지키는 사내가 쫒아오는 걸 몰랐음을 뉘우쳐, 3개월간 뜰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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