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자전소설

나의 혈통

김현거사 2014. 5. 11. 16:21

2012.09.12. 08:22 http://cafe.daum.net/namgangmunoo/5gNC/626 

 

   나의 성격,나의 혈통

 

 젊은 시절에 나는 남모르는 고민을 안고 살았다. 너무 직선적인 성격 때문이다. 대학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배웠지만 약효가 없었다. 옆 사람의 맘을 차분히 살피지 못하고 불쑥 말을 밷곤했다. 아무리 공부 하고, 수양을 해도 성격은 고쳐지지 않았다. 공자는 '채색은 흰 바탕이 있은 연후에나 가능하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가식 보다는 솔직한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마음 바탕이 있은 연후에야, 예(禮)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나는 늘 이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바람에 더 사근사근하지 못하고 차분히 남 배려하는 태도가 아니었던지 모른다.

 그 성격 살면서 후회한 적 많다. 그룹 홍보책임자로 있을 때였다. 밑에 홍모 과장과 권모 대리, 그리고 여기자 셋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권대리가 단국대 직원으로 가겠다며 나에게 사표를 내밀었다. 완전히 배신 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를 인정하여, 월급 인상 폭도 남보다 많이 정해주고, 수당도 시원스레 주었다. 속으로 나혼자 그를 짝사랑한 셈이다. 그러나 고대 후배인 홍과장 이야긴 즉 딴판이었다. 우선 내가 주관하던 편집회의 때는 부원들이 숨 한번 제대로 쉴 수 없었다고 한다. 내 딴에는 일당 백 인재를 키운답시고 무능한 상사가 흔히 그러듯 부하에게 완벽을 요구했던 것이다. 기사 문장 하나 그냥 넘어간 일 없고, 사진 그냥 인정한 적 없었다고 한다. 전부 고치고 토를 달았다고 한다. 그게 내 딴에는 그를 애낀다고 특히 권대리한테는 더 심했다고 한다. 그러니 그가 견딜 수 있었겠는가. 권대리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자식 가진 사람이 사표 쓰고 딴 데 옮길 때는 오죽 고민 많고 달달 볶는 상사가 미웠겠는가. 그래 그에게, '미안하다. 너를 아낀다는 것이 너무 서툴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너를 인정하였다. 이것만 알고 가라.' 그러고 작별했다.

 

 그 후 나는 많이 고민했다. 기업에서 부하가 떠나가는 상사는 무조건 문제있는 자다. 나는 통솔력 없는 갑부였다. 하자가 있는 간부였다. 조직에서 이런 간부는 쓸모없는 간부다. 그래  마치 땅을 헛짚은 것처럼 크게 휘청하면서 내 잘못을 반성했고, 그 당혹감으로 오래 동안 맘고생을 했다.

  이런 옹졸하고 급한 내 성격은 내가 아무리 벗어나려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무슨 족쇄 같았다. 갖은 주의와 노력을 해도 변하지 않았다.


사교성 없는 나의 성격은 나 자신조차 못마땅한 것이었다. 자신은 솔직한지 몰라도 남은 어디 그런가. 내 성격은 못마땅할 정도가 아니라, 아무리 벗어나려 . 선비들은 맛의 최상 경지는, 담담한 채근(菜根)의 맛이라 한다. 사람을 사귀는 것도 담담해야 하고, 인생도 담담해야 한다. 그래서 옆에 가면 누구나 포근함을 느껴야 한다. 그런데 대쪽처럼 날카롭게 한쪽으로만 갈라지는 나의 성격은 어디다 쓸 것인가. 어째서 내 성격은 이럴까, 혼자 전전긍긍 했다. 이런 자괴감은 아마 오십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날 그런 생각을 말끔히 벗어버렸다. 우연히 집안의 족보를 뒤적거리다가 였다. 김해김씨 사군파(四君派). 거기에 나의 아이덴티티가 있었다. 사군파는 네 분 무장의 무맥(武脈)을 이은 혈통이다.

 

 첫번째 극조(克) 할아버지는, 신장이 9척((2m 70cm)이고, 얼굴이 아주 붉었으며, 근력이 강하여 활을 당기는 힘이 300근 되는 물건을 들어올리는 힘과 맞먹었다고 한다. 목소리는 천둥소리 같았으며, 손으로는 쇠갈쿠리를 펼 수 있었고, 호두와 잣 같은 아주 단단한 것을 모두 손으로 껍질을 깠다고 한다. 의성현감을 지냈고, 사후에 병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학천군(鶴川君)에 봉하졌다. 

  극조 할아버지 아드님 완(完) 할아버지 역시 타고난 무골이었다. 신장은 7척장신이고, 기백이 천사람을 제압하였다고 한다. 힘이 다른 사람과 달리 출중하여 크나큰 솥도 불끈불근 드는 용력을 가졌으며, 특히 활을 잘 쐈다고 한다. 이괄의 난을 만나, 도원수 장만(張晩)의 선봉장으로 서대문 밖, 질마재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여, 난이 평정되자, 진무공신(振武功臣) 학성군(鶴城君)으로 봉해졌고, 임진왜란 시는 이순신 휘하에서 옥포전투, 한산도대첩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 후에 전라우수사,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학성군의 장남 여수(汝水) 할아버지는, 인조 때 무과양장(兩場) 장원(狀元) 하시어, 왕이 친히 삼괴당(三魁堂) 3자를 하사했다.  용모가 장대하고, 임기웅변에 능했고, 평상시에도 무기와 사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사헌부 감찰, 절충장군 함경남도 병사 겸 북청부사, 북도병사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다가, 해성군(海城君)에 봉해졌으며, 제주목사, 포도대장 등을 거쳤고, 사후에 의금부 오위도총부 도총관, 호조판서를 증직 받았다.

 해성군의 아드님 세기(世器) 할아버지는 효종 때 무과급제하여, 내금위장, 전라좌도수군절도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남한산성 외곽을 쌓으셨고, 학림군(鶴林君)으로 봉해졌다. 우의정 이완(李浣) 장군이 그를 한번 보고는 말하기를 “정말 호랑이 같은 아버지에 호랑이 같은 아들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행실과 기량은 보통사람보다 뛰어났고, 두드러진 장수의 기풍으로서 동료와 부하들을 어루만지고 사랑했다고 한다. 임종 시는 <어떤 곳이 성을 쌓을 수 있고, 어떤 곳에는 병사를 매복시킬 수 있으며, 어떤 전함은 어떻게 만들어야 한다>는 등 끊임없이 말씀하시기를 애쓰다가 돌아가셨다. 부고를 들은 임금이 괴롭게 애도하며 집무를 보지 않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했다.

이로서 이른바 김해김씨 사군파(四君派)가 이뤄진 것이다.

 

 혈통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조 수로왕은 신장이 9척으로 은나라 탕왕과 같았고, 얼굴이 용안인 것은 한나라 고조와 같았으며, 눈섶의 팔채(八彩)는 요임금 같았고, 두 눈동자를 가진 중동(重瞳)은 순임금과 같았다고 한다. 수로왕의 12대 손으로, 삼한을 통일한 김유신장군 역시 뛰어난 명장이다. 원래 김해김씨 자체가 무골 혈통이었다. 무장은 전쟁에 임하여, 남보다 더 용맹스럽고 과감한, 임전무퇴(戰無退)의 정신을 가졌을 것이다.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기개로, 강한 상대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보였을 것이고, 약한 자 앞에서 큰 도량을 보였을 것이다. 작전에 임하여, 남보다 더 치밀하고, 스케일이 컸을 것이고, 동료를 사귐에 믿음이 강하고, 결코 겉으로 겸손한 척 하면서 속으로 딴 마음 품는, 옹졸한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피가 내 혈관 속에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자랑스런 혈통이었다. 관솔에 불 부친듯 맹열하고 직선적인 성격이라고 결코 부끄러워할 일 아무 것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내 맘은 편안해졌다. 소나무도 있고, 대나무도 있고, 매화도 있고, 복사꽃나무도 있다. 그러나 매화나 복사꽃만 좋은 것이 아니다. 은은하고 온화한 것도 좋지만, 굳세고 곧은 것도 좋은 것이다. 세상은 넓고, 모두는 다 각자의 쓰임새가 다르다. 나의 처세는 실수도 많고, 문제도 있다. 그러나 좋은 조상 두고, 씨 다른 다른 집 쳐다볼 이유가 없었다. 공자님도 '직(直)'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셨지 않았던가. '무인의 혈통이라면, 무인의 후손답게 살자. 대범하게 죽죽 뻗어나간 소나무 대나무는 얼마나 시원한가. 송죽(松竹)의 절개는 또 얼마나 귀한 것인가.' 이렇게 편하게 맘 정하고, 그 후로 나는 내 혈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기로 맘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