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전자책· 수필

책머리에

김현거사 2013. 12. 21. 11:32

   책머리에

 

 간혹 마음을 비우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때 둥굴고 원만하고 아무것도 채워지지않은 순백의 달항아리를 바라본다. 그것은 학이나 국화나 연꽃이 그려진 초화문 항아리는 아니다. 그러나 텅 빈 속에 오히려 무한한 여백을 안고있다. 세상사란 무엇인가. 누구는 물 위에 비친 달그림자라 하고, 누구는 바람이 지나가면 흔들리는 뜰의 대나무 그림자라 한다. 부침과 생멸이 물 위에 비친 달그림자,바람이 지나간 뜰의 대나무 그림자라 한다. 은퇴 후는  아침엔 책을 읽고, 오후엔 산에 약수 뜨러간다. 산을 사랑하고, 술과 달을 사랑하고, 문장을 사랑하려고 하였다. 돈과 권력같은 건 되도록 멀리하였다.

 젊은 시절은 철학을 배웠다. 은퇴 후에 수필가가 된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하나를 버리면 하나를 얻는다. 세상사를 버린 대신 몇개의 글을 얻었다. 그동안 잡지에 기고한 글이 책 한권 분량이 되어, 한 권의 책으로 엮는다. 그것은 달항아리처럼 둥굴고 원만하고 아무것도 채워지지않은 순백의 것은 아니다. 서투른 도공이 만든 학이나 국화나 연꽃이 그려진 초화문 항아리 같은 것이다. 그러나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떠나는 인생이라 하지 않던가. 누군가 서투른 그 도공의 흔적을 웃는다해도 할 수 없다.

 

 

 

산으로 가는 뜻은

 

 

    소나무

 

 

  정초에 눈이 한 자나 쌓여 꼼짝없이 갇혀 지냈다. 밖은 백설 만건곤한 설국이라, 백자 화분 속의 소나무 분재하고 놀았다. 낙역재기중(樂亦在其中)이란 말이 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베개하고 누웠으니 즐거움이 역시 그 안에 있다는 말이다. 사방 한 자 남짓되는 분재지만, 정을 붙이니, 그 속에 태산준령의 운치도 있거니와, 옛 선인들 풍류도 있다.

 

 우선 혼자 눈 쌓인 설경을 연출해본다. 밖에 나가 접시에 하얀 눈을 담아와서, 푸른 잎새, 주름진 수피, 용틀임한 뿌리 위에 얹자, 갑자기 한 폭의 송설도(松雪圖)가 눈 앞에 보인다. 잠시 후 눈이 녹는 모습도 볼만하다. 눈은 물방울되어 천천히 녹아 떨어지면서 잎새, 수피, 뿌리의 순서로 적신다. 푸른 솔에 흰눈 쌓인 모습이 한겨울 설경 운치라면, 한방울 두방울 똑똑 물방울 떨어지면서 솔을 적시는 모습은 해동하는 이른 봄 운치다. 그리고 촉촉한 물끼가 나무의 주름과 밝은 부분, 어두운 부분, 튀어나온 부분, 쑥 들어간 부분을 적시는 모습은 소나기 후 여름의 운치다. 눈 녹은 물에 목욕한 나무는, 금방 목욕한 사람처럼 싱그럽다. 뿌리 부근에 파란 이끼빛 살아난다. 이런 것은 정말 놓치지않고 눈여겨 보아야 한다.

 

 도연명은 '가을은 달이 볼만하니 달은 밝고 휘황함을 드높이고(秋月揚明輝), 겨울은 소나무가 볼만하니 산마루에 외로이 선 소나무가 빼어나다(冬嶺秀孤松)' 하였다. 겨울은 소나무의 멋이 가장 들어나는 철이다. 기대승(奇大升)은 '깨진 솥에 술을 데워 혼자 마시고, 소나무 밑에 취해서 누우니 세상의 시비가 없네.' 라며 여름 소나무 밑에 누워서 세상사 잊은 마음을 노래했다. 길재(吉再)는 '오경에 지는 달 창 앞에 희고, 십리에 불어오는 솔바람 침상에 맑게 부네.' 라며 달밤에 은거인의 침상에 불어오는 송뢰를 노래하였다. 홍우원(洪宇遠)은 '밤은 고요하고 산은 텅 비어 물소리 더 맑은데, 텅 빈 창가의 꿈은 성긴 소나무 사이 지나가는 빗소리 였어라.'라며 소나무 사이의 빗소리를 읊었다.

 

 이렇게 시인묵객이 다투어 읊은 주인공 소나무는 도대채 어떤 나무인가. 원래 소나무를 의미하는 '솔'은 나무 중 우두머리를 뜻하는 '수리'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황제가 소나무를 뜻하는 송(松)을 목(木) 중에 공(公)이라고 높인 데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럼 우리 선조들이 가장 아껴온 소나무는 어떤 소나무인가. 태백산 줄기를 타고 금강산에서 울진 봉화 청송을 거쳐 자라는 금강송(金剛松) 이다. 적송 중에서 유전형질이 우수한 소나무를 금강송이라 부른다. 삼척 미로면 이태조 5대조 준경묘 주변의 황장목(黃腸木)과 경북 춘양의 춘양목(春陽木)이 가장 유명하다. 적송은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자라면서 마디가 길고 껍질이 유난히 붉다. 결이 곱고 단단하고, 켠 뒤에도 굽거나 트지않고 잘 썩지도 않는다. 한번이라도 적송 아래 가서 그 허리를 껴안고 5분만 있어보자. 적송의 수피에서 풍겨나오는 향기가 얼마나 짙은가를 대번에 알 수 있다. 이 향기로운 적송으로, 임금님의 관을 만들고, 궁궐을 짓고, 목조미륵반가사유상 만들고, 남대문 대들보를 얹힌 사람들이 바로 우리다.

 

 세한도(歲寒圖)를 생각해본다. 추사가 제주도에서 그린 그림인데, 바닷가의 작은 초옥과 비스듬히 선 다섯 그루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소나무가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쓸쓸한 귀양살이 추사 자신 모습 같다. '세한이 되어야 비로서 소나무 잣나무의 푸름을 안다.'는 발문은 아마 당시 추사 자신의 심정일 것이다. 송하관수도(松下觀水圖)를 생각해본다. 청풍 부사 윤제홍은, 고사(高士)가 소나무 아래 앉아서 흐르는 계류를 바라보는 그림과, 송하소향도(松下燒香圖)라 해서 소나무 아래서 향을 피우는 노인을 그렸다. 단원 김홍도는 송하선인취생도(松下仙人吹笙圖)를 그렸다. 소나무 아래 선인이 생황을 불고 있는모습이다. 생황의 소리는 어떤 것일까. 달빛 아래 용의 울음처럼 처절하다고 화제(畵題)에 써놓았다. 해남 윤두수의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는 한 선비가 비스듬이 앉아 물끄러미 폭포를 바라보는 모습을 그렸다. 이인상의 송하관폭도는, 암반에 뿌리 내리고 용소를 향해 구부러진 노송 한 그루와 그 곁에서 폭포를 바라보며 단정히 앉아서 시상에 잠기는 선비를 그렸다. 김수철의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는 소나무 계곡에 모여 한가로히 담소를 나누는 선비 모습을 그렸고, 이인문은 송하한담도에 냇물이 시원하게 흘러가는 암벽과 다섯 그루 노송이 선 곳에 세 선비가 편안한 자세로 이야기하는 그림을 남겼다. 화가들마다 이처럼 다투어 소나무를 그린 것은, 다 소나무를 숭상한 흔적이다.

 

  나는 집에서 소나무 분재를 키우면서, 내가 직접 만난 소나무들을 회상해본다. 푸른 파도 부딪쳐오던 하조대 기암절벽의 소나무, 달빛 속 청간정 골기와 위에 그림자 던지던 소나무, 화암사 계곡 폭포 위의 소나무, 속리산 정이품소나무, 영월 청령포의 관음송(觀音松)을 생각해본다. 척박한 땅이나 바위 틈새에 굳건히 뿌리 내린 소나무의 생명력과, 굽어지고 옹이 박힐수록 더 고고한 소나무의 기품을 생각한다.

 소나무는 항시 시인묵객들 시의 소재였고, 그림의 소재였다. 소나무는 풍류의 나무요, 탈속의 나무요, 세한삼우(歲寒三友) 중 첫째 이다. 나는 소나무를 오래된 휘귀한 골동품이나 탈속한 군자를 대하듯 한다. 소나무에서 도연명 기대승 길재 홍우원의 시를 읽는다. 추사나 윤제홍 김홍도 이인상 김수철 이인문의 그림을 만난다. 선인들의 풍류와 탈속을 배우고, 고고한 절개를 배운다. 작은 소나무 분재 하나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나는 소나무 분재와의 사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국수필 2010년 3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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