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전자책·수필 이론

산수화 화법과 수필 작법 (1)

김현거사 2013. 9. 13. 09:37

 산수화 화법과 수필 작법 

 

  중국 역대 회화를 소개한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란 책이 있다. 이 책은 역대 명품들 소개와 아울러 동양화(東洋畵)를 공부하는데 필요한 이론(理論)이 수록되어 있다. 1675년 청나라 강희(康熙) 18년에 1집이 출간되고, 그로부터 22년만인 1701년에 3집까지 완성되었다. '개자원'은 명나라 말기 중국의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에 살던 부호이자 예술 애호가인 이어(李漁, 1611-1680)의 별장 이름이다.

나는 산수화를 좋아하여, 자주 이 책을 보면서, 산수화 이론과 수필 작법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림을 그릴 때 대상이 있듯이 수필을 쓸 때도 대상이 있다.

우선 화가는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가. 회화 육법(六法)부터 살펴보자. 1.氣韻生動(기운생동)   2.骨法用筆(골법용필)   3.應物象形(응물상형)  4.髓類賦綵(수류부채)   5.經營位置(경영위치)  6.傳模移寫(전모이사)  등이다. 이 여섯가지 법은 그대로 수필 이론으로 참고해도 무방할 것 같다.

  기운이 생동하지 않는 글은 죽은 글이다. 대채로 문인은 대상을 글로 절실히 표현하고는 싶어하지만, 화가처럼 대상의 형태나 색채, 음영, 장면 묘사를 그림으로 선명하게 그려내놓지 못한다. 나무를 그냥 나무, 구름을 그냥 구름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호랑이를 그리면서 대충 고양이 하나 그려놓고 넘어가는 셈이다. 이런 글은 생동감이 없다. 반면 화가는 나무를 예로 들면, 언덕에 비스듬히 선 나무, 햇볕에 빤작빤작 잎이 빛나는 나무를 그린다. 나무의 그늘까지 그린다. 바위를 안고 돌아나간 뿌리까지 구체적으로 그린다. 구름도 마찬가지다. 각종 색깔과 미묘한 음영의 차이까지 노심초사해서 그린다. 그냥 구름만 그리지 않고, 산마루, 바다, 들판까지 그려서 분위기를 살린다. 자연을 아름답게 생동감있게 표현함이, 양자 모두의 당연한 의무이지만, 기운생동이란 이 말은 수필가가 반드시 유념해야할 말이다.

그 다음 골법 용필이란 것은 무엇인가. 작가에게 문체를 어떻게 구사해야하는가를 말해주는 것 같다. 헤밍웨이처럼 짧은 하드보일드 문체로 쓰느냐, 임어당처럼 해학과 유머를 풍부하게 구사하며 능걸맞게 쓰느냐, 소동파나 왕휘지처럼 풍류 가득하게 쓰느냐, 모파쌍의 스승 풀르베르처럼 정확성 위주로 쓰느냐, 그림을 어떤 터치를 할 것인가. 이것이 그림에서의 골법 용필법인 것 같다.동양화에서 골법은 단지 붓을 사용해 그려진 선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수필도 마찬가지다. 단어 하나하나가 단순히 그냥 거기 갖다놓여진 활자여서는 않된다. 응물상형은 형의 사실성을 말한다. 소조(蕭照)는 즐기어 기봉(奇峰) 괴석(怪石)을 그렸는데, 그것을 바라보면, 큰 파도가 솟아오르고, 구름이 모여들며, 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세가 있었다. 운림(雲林)의 산 그림은 필(筆)이 아니간 데에도 화(畵)가 있었고, 황공망(黃公望)의 산수화 용필은 직선 중에 굴절(屈折)이 있어서, 일필(一筆) 중에 억양 변화가 있었다. 오도현(吳道玄)이 물을 그리면, 밤새도록 물소리가 났다고 하는데, 이것은 다만 물을 그릴 뿐이 아니라, 능히 바람을 그렸기 때문이다. 문장을 읽으면 그림이 안전에  나타나야 하고, 물소리 바람소리가 들려와야 된다. 단어 하나하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을 품어야 한다. 평소 이런 심정으로 이렇게 부단히 노력해야  수필의 진수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수류부채는 색의 사실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글에도 색깔이 있다. 감성적인 글, 지적인 글, 건조한 글, 간결한 글, 화려한 글이 있다. 이런 글들은 각각 다른 색깔을 나타낸다. 작품의 내면적 감성과 정서와 분위기를 형성한다. 경영위치는 구도가 적절해야 함을 말한다. 전후좌우 배치, 시작과 끝맺음의 자연스런 귀결이 글의 맛과 품격을 높여줌은 말 할 것도 없다. 전모이사는 화가의 기능연습으로 또는 전통의 체험으로서 고대의 명화를 모사할 것을 장려한 규칙이다. 수필가도 명품을 많이 읽고, 느끼고, 습작을 많이 해봐야 함은 말해준다.

 먼저 회화 육법(六法)에서 수필가가 배워야 할 점을 간추려 보았다.

 

   

원(元)나라 하문언(夏文彦)은 말하였다.

'기운이 생동하여 천품(天稟)에서 나오고, 그 교묘한 것을 다른 사람이 배울 수 없는 것을 신품(神品)이라고 하고, 필세(筆勢)와 묵색(墨色)이 탁월하며 채색하는 법이 알맞음을 얻어 여운이 있는 것을 묘품(妙品)이라고 하고, 그림이 그 물형(物形)과 같고, 법식에 틀리지 않음을 능품(能品)이라고 한다. 이 삼계급의 구별은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예술 어디에도 잘 들어 맞을 것이다.

 

 붓을 회롱한다고 다 문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쓴다고 모두 신품이나 묘품이나 능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높은 경지는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청나라 때 만들어진 '패문재서화보'에는 산수화가(山水畵家)가 그림을 그릴 때 피해야 할 12가지가 있다.<회종(繪宗)12기(忌)>.

  

 구도가 몹시 혼잡한 것을 꺼리고<포치박새( 布置迫塞 )>, 먼데도 가까운 데도 한 모양으로 구별이 없음을 꺼리고<원근불분( 遠近不分 )>, 산과 산에 연속되는 기맥이 없이 산산히 떨어짐을 꺼리고<산무기맥( 山無氣脈 )>, 물에 수원과 하류와의 구별이 없음을 꺼리고<수무원류( 水無源流 )>,  경치에 평탄한 데와 험조(險阻) 한 데의 구별이 없을을 꺼리고<경무이험( 境無夷險 )>, 도로에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곳이 없는 것을 끼리고(숲에 가리운 낭떠러지를 보이게도 하여, 단속(斷續)의 정취가 있는 것을 좋게 여긴다는 것), <노무출입( 路無出入 )>,  돌이 입체적이지 못하고 한 면만 보이고 있는 것을 꺼리고<석지일면( 石止一面 )>, 수목이 사방으로 나아간 가지가 없음을 꺼리고<수소사지( 樹少四枝 )>, 인물은 고사 일인(逸人)을 생각하게 하고 천격이 됨을 꺼리고<인물구루( 人物 傴僂)>, 누각은 규구(規矩)가 바르지 않을을 꺼리고<누각착잡( 樓閣錯雜 )>, 햇무리 달무리같은 훈(暈)의 농담(濃淡)이 잘 맞지 않음을 꺼리고<농담실의(濃淡失宜)>, 점태(點苔) 와 채색이 법식에 맞지 않음을 꺼린다<점염무법( 點染無法 )>고 하였다. 

(*이 글은 원(元)나라 요자연(饒自然)의 설이라는 판본도 있다.) 

 

 이 기피 사항들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화법상의 법칙이다. 이것을 깨고, 또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그린 화가도 얼마든지 있었다. 대체로 특출한 천재 화가는 처음에 배운 화법에 얽매이지 않고 독창적인 화법(畵法 )을 스스로 만들었다 

 

  어쨌던 그림과 마찬가지로 수필도 꺼려야 할 점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구도가 혼잡하거나, 글의 연속성과 맥이 산산이 떨어져 있거나, 글이 입체적이지 못하여 너무 평이 하거나, 소재가 천격이고 고아한 맛이 없거나, 기량이 떨어진 문장은 당연히 꺼리는 대상이 될 것이다. 소식(蘇軾, 1036~1101)은 왕유(王維)의 시와 그림을 보고,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라고 평하였다. 마음 속에 시가 있은 연후에라야 이런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작가 마음 속에 먼저 시가 없다면, 아무리 문장을 다듬어본들 무엇 하겠는가. 헛수고일 것이다. 서예가인 지영(智永) 스님은 글씨를 배우는데, 붓의 털이 닳아 못쓰게 된 것이 열 독이 넘었다고 한다. 이것을 땅에 묻고 이름하여 퇴필총(退筆塚)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붓 하나를 털이 닳아 못쓰게 되려면 수천번 수만번 사용했을 것이다. 그 붓을 담은 독이 열 독을 넘었다니, 지영 스님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알 수 있다. 글 쓰는 사람이 옷깃을 가다듬고 마음 속으로 새겨두어야 할 전례다.

 

(수필문학 2013년 4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