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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건너 육거리 풍경

김현거사 2011. 3. 27. 12:51

   배건너 육거리 풍경

 

 어릴 때 우리집 앞에 육거리가 있었다. 습천에서 오는 길, 역전에서 오는 길, 천전학교서 오는 길, 남강 철교서 오는 길, 망경북동에서 오는 길, <지수>서 오는 길이 있었다. 육거리에는 한약방과 구멍가게가 있고, <부산여관>이 있고, 이발소와 약방이 있고, 좀 가면 성수네 방앗간과 해인고등학교가 있었다.

여름에는 길바닥 시원하라고 탱자울타리 밑에 흐르는 물을 모아 바가지로 뿌리곤 했다. 그리고 대나무 평상을 내놓고 한가히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으로 낙으로 삼았다. 내가 <쎄비리모티>서 꺽어온 수양버들이 자라 그늘이 시원해, 우리 평상은 항상 사람들이 엉뎅이를 붙이고 잠시 쉬어가는 휴게소요, 동네 사람 모이는 사랑방이었다.

 이 진주 망경남동 41번지에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큰 단감나무 네 그루 있던 우리 뒷집이다. 우리집에도 두 그루 큰 감나무가 있었지만 떫은 감이라 홍시 되기 전에는 먹지못해서, 나는 주로 그 집 단감을 애용했다. 그 집 어른은 젊잖은 교장선생님이고,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와 절에 자주 다닌 분인데 막내아들 남홍이를 표나게 사랑했다. 남홍이는 내 단짝 친구로 어릴 때 온갖 재작을 나에게 가르쳐 준 장본인이다. 장남은 진중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최남덕 선생이고, 둘째는 병역기피자로 한동안 우리집 대청 밑 골방에 숨어 살다가 우리 외삼촌이 서울로 데려가 모 제지회사에 취직시켜 나중에 그 회사 사위가 되어 부회장을 한 남두형이고, 그 밑이 우리 형 동기인 남철이 형이고. 그 밑이 사범학교에 다니던 남순이 누나다.

 길 건너 구멍가게집은 인물 잘 생기고 늘씬한 몸매를 가져 처녀들에게 인끼 좋고, 진주 주먹들이 알아주던  장수 형이 살았다. 그 집 어른은 진주 산청 다니는 버스 기사였는데, 운전대에 사냥 총 걸어놓고 다니다가 지리산 기슭 어디던지 꿩이 나타나면 승객은 아랑곳없이 버스 세워놓고 총질하던 분이다. 그 집  사냥개는 늘씬한 포인터였는데, 우리집 잡종 진돗개 땅개를 만나면 꼬리를 내리고 달아나곤 했다. 장수형 여동생 장미는 이름 그대로 장미처럼 이뻤지만, 나는 장수형이 무서워서 그에게 말도 한번 걸어보지 못했다.천전초등 가는 길에 삼식이형도 주먹으로는 진주서 알아주던 형이었고, 내 동기인 그의 조카 성복이는 경희대 음대를 나와 카루소같은 미성으로 벨칸토를 그렇게 멋지게 잘 불러서 사람들 감탄을 받더니 끝내 진주교대 교수를 하다가 대학원장까지 했다. 그 집 옆 <하고약>집의 삼촌은 우리 큰형과 하고한 날 평상에 앉아 바둑을 두거나, E마이너니 F마이너니 하면서 <애수의 소야곡>같은 곡을 키타로 치곤하던 한량이다. <하고약>집 아들 위수는 내 동기인데 지금 진양호 옆에 멋진 호텔을 짓고는 이런 풍경은 외국에 가도 별로 없다고 자랑하고 있다. 주먹으로는 신영균형도 알아주는 스타였다. 중년 넘어 내가 진주에 갔다가 여전히 어깨 쩌억 펴고 선거판을 휩쓸고 다니는 영균 형 모습을 보았다. 우리 어머니 친한 계꾼이 역전파출소 근처 제재소 안주인인데, 그 집 아들 재식이는 고등학교부터 서울서 다니더니 나중에 한국유리 사장을 했고, 부모님들과 삼천포 해수욕장에 같이 갔던 재식이 누나와 여동생은 하도 이뻐서, 사천 공군들이 줄줄 물 속까지 따라다녔다. 근처에 살던 우리 고모님은 천부적인 만담가였는데, 고종사촌 기주형은 진농의 주먹이고, 나중에 법원경매에 손을 대어 원지에 좋은 집을 장만하기도 했다. 여름에 우리집 평상에 누워 하늘에 뜨가는 구름을 보거나 밤하늘의 별을 볼 때, 항시 창가 커텐 뒤에서 창밖 평상의 풍경을 훔쳐보던 두 소녀는 수줍어서 집 밖에 나와서 놀지않던 마즌편 한약방집 두 딸이다. 우리 평상 옆을 지나다니던 아가씨들도 많았다. 습천못 쪽에 살던 박모라는 내 한 해 위 여학생의 동생 철이는 한국은행 부총재를 했다. 습천에 살던 영자도 남학생들 사이에 이름 높았고, 내 이종사촌 민자는 애교하면 따를 자가 없었다.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배건너 육거리 하면, 가장 명물은 <청깨>다. 지금 생각해도 그의 부모님이 왜 그에게 청깨라는 독특한 이름을 지어줬는지 모르겠다. 청깨는 애꾸눈에다, 집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늘상 길에서만 놀았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싸움판에는 그가 꼭 끼었다. 꼭 카리비안의 유명한 해적 애꾸눈잭 같았다. 이 청깨가 아직 육거리에 살면서 초등학교 동기 모임에 나온다는 소식 듣고, 갑자기 고향 그리움 뭉클 솟아, 그를 꼭 한번 만나봐야지 하는 생각이 든 적 있다. 

길 건너엔 약방과 이발소가 있었다. 약방은 이미 고인이 된 동기 조규용의 형이 주인인데, 규용이 형은 내 작은형과 동기다. 약방 안주인 용환이 엄마는 우리 평상의 단골 손님이었다.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붙임성이 있어 누구나 그를 칭찬하고 좋아했다. 진주 농대 교수 부인인 은경이 엄마도 평상의 단골손님 이었다. 서울 출신이라 표준어를 구사하던 은경이 엄마는 우리집 아랫채에 세들어 살았는데, 미인인데다 한때 문학소녀여서 나는 그가 소개해준 헷세나 투르게네프를 지금도 좋아한다. 우리집 가게방에 세들었던 필년이 엄마는 한많은 여인이었다. 물장사 출신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신문사 지사장 첩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항상 세모시 적삼을 깔끔하게 입고 있었고, 양녀인 필년이한테는 그렇게 성질을 부리면서도 나한테는 총각 총각 해싸면서 밤 늦어도 평상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러면 신랑이 컹컹 헛기침을 해서 불러들이곤 했다.

 부인들에게 인끼 많던 이 몸이 그 당시 왜  항상 이발소 앞에만 가면 스스로 못생겼다는 열등감에 빠지곤 했던지 모르겠다. 그 당시는 머리에 쇠똥이란 것이 왜 그리 많던지. 머리 감아주는 이발사한테 왜 그리 매번 챙피한 생각이 들었던지 모르겠다. 이발소 거울 위엔 그림이 걸려있었다. 숲이 있고 폭포가 있고 초가집 있는 소위 이발소 그림이었다. 이발소 안가겠다고 버티어 어머니 독촉에 밀려가던 기억도 새롭다. 그 이발소는 그 후에 내가 군대 갔다가  제대하고, 대학을 복학하여 졸업하고, 장가가서 아들 낳고 딸 낳고, 강산이 다섯번이나 변한  오십년 후에도 그 자리에 남아있어, 언젠가 갔다가 큰 감동을 받은 적 있다.

회상해보면 고향풍경처럼 정답고 그리운 것이 없다. 타향의 그 무엇이 고향에 비기랴. 한없이 그리운 것이 고향이다. 육거리에는 남홍이네 탱자울 탱자꽃이 봄에 하얗게 피었다가 가을이면 노란 탱자가 주렁주렁 열렸다. 탱자나무 가시 위로 남홍이네 단감이 주렁주렁 열렸었다. 나는 길에서 늘 어느 감이 잘 익고 큰지 눈여겨 보았다가 밤에 몰래 올라가서 따먹곤 했다. 오정 지나면 사천 함티장수 아줌마들이 줄지어 우리 평상 앞을 지나갔다. 함티 속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갈치와 게였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갈치와 게를 좋아한다. 개발과 싱게이(파래)도 좋아한다. 함티장사 아줌마들은 시내를 돌기 전에 짐을 가볍게 하려고 으례 우리 평상에다 짐을 풀어 싸게 팔았다. 그러면 물동이 이고 우리집 샘에 물 뜨러오던 부인네들이 하나씩 사갔다. 늦은 오후가 되면 십리도 넘는 평거에 있는 사범학교서 걸어서 돌아오는 남순이 누나 모습이 보이곤 했다. 나는 얌전한 남순이 누나가 어딘가 신비해서 항상 좋았다. 약골 우리 고모부는 커다란 누렁소가 끄는 소달구지를 끌고와서 인분을 퍼가곤 했다. 사촌동생 정태를 소 등에 태우고 온 적도 있다. 그 어리던 동생이 나중에 산청에서 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 했다. 어머니가 막걸리를 대접하면 고모부는 원없이 신세타령을 하다 가시곤 했다. 고모님을 일찍 여위었기 때문이다.

 그 평상에서 낮에는 바둑 두고, 밤에는 키타 반주 맞춰 <다시 한번 그 얼굴이 보고 싶어라> 같은 남인수의 노래 불렀다. 은경이 엄마와 나란히 앉아 부채 부치며 헷세와 투루게네프 작품 이야기 하다가 진주극장 영화보고 돌아오는 사람들 다 지나간 늦은 밤 촉촉한 밤이슬 맞으며 각자 집으로 들어갔었다. 현재 수필을 쓰는 나는 그 대나무 평상에서 감성의 싹이 텄는지 모른다. 그 여름 피웠던 모깃불 연기처럼 육거리 살던 추억은 지금도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러나 막상 이제 겨울 밤 배건너 그 육거리에 외치고 지나간 찹쌀떡 소리처럼, 사람도 추억도 멀어져 간다. 내가 자란 육거리엔 낮설은 삼층 건물 몇개만 무심히 서있다. 고향은 이제 그리움 가득한 나의 가슴 속에만 존재하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