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강의

수필 강의

김현거사 2011. 1. 26. 14:02

 

     쉽게 수필 쓰는 법

                                                                                                                            김창현

 

  수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쓰면 되는가. 여러 사람이 고민하는 것을 보았다. 은퇴 후 수필가란 것이 되자 나도 이 문제에 부닥쳤다. 그래 여러 수필 이론을 읽어보았으나 아하 이렇게 하면 수필을 쉽게 쓸 수 있겠구나 싶은 글은 없었다. 수필의 성격이니 역사니 하는 복잡한 이야기만 많고 정작 알맹이는 없었다. 그래서 늦깍기 나름대로 쉽게 수필 쓰는 법을 좀 연구해보았다.

 

  수필(隨筆)은 글자 그대로 따를 수(隨)에 붓 필(筆)이다. 붓 따라 가면 된다. 그런데 글을 쓸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숙제를 앞 둔 아이들처럼 된다. 마음이 딴 데로 간다. 머리 속이 하얀 백지처럼 비어버린다.  왜 그런가. 그 해결책이 무엇인가.

 

  우선 쓸 '꺼리'가 없다는 이야기부터 검토해보자. 우리에게 쓸 꺼리가 없는가?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다. 우리는 벙어리가 아니다. 친한 친구 만나면 말만 잘한다. 

그런데 글을 쓰려면 왜 막막해지는가. 부담감 때문이다.  

 이 부담감 가지고 백날천날 책상 앞에 앉아봐야 소용없다. 그런데 문인 중에 글감이 없다느니. 여행 가서 얻어와야 겠다느니 궁색한 소리를 하는 분이 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린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이런 이야길 들려주고 싶다. 알다시피 인간의 머리는 컴퓨터보다 복잡하다. 수만가지 기억과 정서가 뇌에 저장되어 있어 그 회로는 아마 국립도서관 장서 보다 복잡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희비애락이 많아 할 말도 너무나 많다. 시장 바닥에 몰려다니는 갑남을녀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모두 얼마나 원통하고 괴롭고 애처러운 일이 많은지. 종교를 설하는 스님과 신부에게 물어보라. 삶이란 것이 얼마나 엄숙하고 경건한 것인지. 대자연에게 물어보라. 철 따라 꽃 피고 새 우는 강산이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로운지.

 우리는 수많은 소재를 경험했고, 세상은 그만치 복잡한 곳이다. 우리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 느낌을 친구와 나누고 싶어한다. 그래서 감방에서 제일 큰 형벌은 독방에 혼자 가두는 것이다. 옆에 말을 건넬 사람을 없애버리는 것 그것이 가장 혹독한 형벌이다.

 

 이쯤이면 쓸 것이 없다란 명제가 오류임을 알만할 것이다.그런데 왜 쓰기가 그처럼 어려운가. 거두절미하고 말해보자. 우리는 대개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메모 수첩 하나 없이 컴퓨터 앞에 용감히 앉은 것이 잘못인 것이다. 사전에 어떤 구상도 없이 컴퓨터 앞에 앉는 사람도 있다. 사전에 거의 완성된 구상을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후자는 이미 작가 반열에 오른 베트란 들이고, 전자는 초보들의 모습니다.

 

 글 쓰기이수첩 하나만 잘 활용하면 일은 반이 해결된 것이다. 메모 수첩에다 잠시 지나가는 생각이나 느낌을 적기 시작하면 글 쓸 '꺼리'를 쉽게 얻을 수 있다.    

  고양이가 쥐 잡는 장면을 연상해보자. 고양이는 항상 쥐를 노린다. 담 넘어 쥐의 흔적을  살금살금 따라가고, 쥐구멍 앞에서 한없이 기다리기도 한다. 쥐가 나타나면 앞발로 날쌔게 후려쳐서 쥐를 잡는다. 우리가 글감을 잡으려고 이처럼 노력하면 않될 일이 무엇일까.

 하루 24시간 수필 '꺼리'를 염두에 두고, 한밤 중에 자다가도, 화장실에 앉았다가도, 버스 타고 다닐 때도, 일구월심 고양이가 쥐를 노리듯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떠오르는 생각을 즉각 메모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실제로 나는 전철 속에서 생각이 떠오를 때 핸드폰에 메모한다. 거실에서 TV를 보다가도 메모한다. 그 때문에 나는 글감 재고가 많다. 시간이 없어 작품화를 미룰 뿐이다.

 

 자 그러면 우리는 이 메모를 어떻게 수필로 만드는 것인가.

 먼저 알을 품은 암탉을 살펴보자. 암탉은 비가오나 눈이 오나 소중히 알을 품는다. 친입자가 나타나면 꼬꼬댁 꼬꼬댁 야단법석을 친다. 그러다 어느날 알 속에서 삐약삐약 병아리 소리가 들린다. 병아리가 탄생한 것이다. 그 병아리는 깃털이 생기고, 날개가 생기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다.

 수필도 이와 같다. 수필 입문자는 우선 암탉이 되어야 한다. 마음에 수필 소재인 메모를 항시 품고있으면 신기한 현상이 일어난다. 소재가 점점 성장하는 것이다. 깃털이 생기고 날개가 돋고, 끝내 삐약삐약 병아리 소리까지 난다. 소재가 반 쯤 수필로 탈바꿈한 것이다.

수필가는 이래야 한다. 암탉을 잡아보면 그 뱃속에서 크고작은 알이 줄줄이 달린 알주머니를 볼 수 있다. 그처럼 수필가도 마음 속에 반쯤 수필로 성장한 글감을 줄줄 달고있어야 한다.

 수필은 우연히 만들어 지는게 아니다. 집념이 있어야 한다. 고양이처럼 집요하게 기다리다가 소재를 움켜잡아야 하고, 암탉처럼 오랜 시간 소재를 마음에 품고 길러야 한다. 이게 수필가다.

 

 자 그러면 수필 초고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메모들을 한번 살펴보자. 메모는 크고 작은 것이 있다. 간단한 것과 긴 것이 있다. 그  속에서 가장 굵다란 놈을 수필 '초고'로 골라보자.

 이 초고는 엉성해도 상관없고 횡설수설이라도 상관 없다. 엉터리라도 상관 없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먼저 초고 한 편은 골라놓고 볼 일이다. 그래야 일이 쉽다. 

 일단 초고를 도마 위에 올려놓아라. 그리고 초고를 고등어 다듬듯 손질해야 한다. 우선 쓸데없는 비늘 벗겨내고, 꼬리 짜르고, 지느라미 짜르고, 내장 뽑아낸다. 필요없는 것은 과감히 손질한다.

 

 이렇게 과감히 수필의 틀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대략 전체 모양을 만들고 나서 부분 손질에 들어가야 한다. 문장은 항상 며칠 뒤에 보면, 수정하고 추가하고 삭제할 부분이 보인다. 주제가 제대로 전달된 것인지, 전체 배열이 자연스러운지 보아야 한다. 자연스럽지 않은 글은 죽은 글이다. 마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울어난 글이 좋은 글이다. 글이 길다 싶으면 짜르고, 짧다 싶으면 보태야 한다. 우물쭈물 주제 불분명한 글은 그 부분 때문에 글 전체를 죽인다. 옛날 사람은 글에 능한 것을 ‘좋은 글’로 여긴 것이 아니라, 쓰지 않을 수 없어 쓴 글을 ‘좋은 글’로 생각했다. 주제 불분명하고 우물쭈물 미사여구로 덮은 글은 문장의 독소다. 반드시 짤라내야 한다.우선 그 다음에 조리 과정으로 들어간다. 생선으로 노릇노릇 고소하게 구울 것인지, 아니면 짭쪼롬한 냄비찌개 만들 것인지 결정 한다. 

 구울 것은 칼집을 내고, 소금 치고, 어떤 불에 어느 정도 노릿노릿하게 굽는 것이 좋을까 궁리한다.  찌개꺼리는 고추 후추 양념도 칠 준비한다. 간을 어떻게 맞출지도 생각한다. 파도 넣고 생강도 넣어본다. 포도주도 좀 쳐야 잡냄새가 없을 것이다. 양념 잘 쳐서 부드럽고 매콤한 요리 만들까, 양념 살짝 쳐서 담백한 맛이 나게 할까, 그것은 각자 맘이다. 

 

 이 정도 되면 수필은 대략 모양을 갖춘다. 그러나 이 과정만 끝낸 수필은 맛이 적다. 덜 익은 수필이라 풋내가 난다. 숙성 과정이 필요하다. 오래된 포도주가 맛이 깊고, 묵은 김치가 감칠맛을 갖는다.

 충분한 숙성과정을 거친 수필이라야 비로소 부드러운 향기와 그윽한 여운을 풍길 수 있다. 

 

 문장이란 항상 며칠 뒤에 보면, 수정하고 추가하고 삭제할 부분이 보인다. 주제가 제대로 전달된 것인지, 전체 배열이 자연스러운지 살퍼 보아야 한다. 글이 길다 싶으면 짜르고, 짧다 싶으면 보태야 한다. 우물쭈물 주제 불분명한 글은 그 부분 때문에 글 전체를 죽인다. 자연스럽지 않은 글은 죽은 글이다. 

 옛날 사람은 글에 능한 것을 ‘좋은 글’로 여긴 것이 아니라, 쓰지 않을 수 없어 쓴 글을 ‘좋은 글’로 생각했다. 마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울어난 글이 좋은 글이다. 우물쭈물 미사여구로 덮은 글은 문장의 독소이니 반드시 짤라내야 한다.

 

너무 딱딱하다 싶으면 몇대목 서정적인 표현도 넣어야 한다. 흔히 수필을 마음의 산책이라고 한다. 산책은 마음이 자유롭고 산뜻해야 좋은 산책이다. 산책 나가서 공연히 어려운 소리 한다던가, 자기 자랑 한다던가, 품격없이 시장바닥 이야기 하면 낙제다. 그런 데이트는 반드시 실패한다. 이런 수정 과정은 많이 거칠수록 좋다.

 

 

 

  다음 과정은 과메기 말리듯 기다리는 과정이다. 건조대에 걸어놓고 해풍도 쐬고 눈도 맞혀서 몇번 얼였다 녹였다 두어둔다. 시간을 보낸다. 술 빚는 양조과정처럼 적당한 숙성이나 증류 또는 여과과정 거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다. 시간이 약이다. 문장은 항상 며칠 뒤에 보면, 수정하고 추가하고 삭제할 부분이 보인다. 주제가 제대로 전달된 것인지, 전체 배열이 자연스러운지 보아야 한다. 자연스럽지 않은 글은 죽은 글이다. 마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울어난 글이 좋은 글이다. 글이 길다 싶으면 짜르고, 짧다 싶으면 보태야 한다. 우물쭈물 주제 불분명한 글은 그 부분 때문에 글 전체를 죽인다. 옛날 사람은 글에 능한 것을 ‘좋은 글’로 여긴 것이 아니라, 쓰지 않을 수 없어 쓴 글을 ‘좋은 글’로 생각했다. 주제 불분명하고 우물쭈물 미사여구로 덮은 글은 문장의 독소다. 반드시 짤라내야 한다. 너무 딱딱하다 싶으면 몇대목 서정적인 표현도 넣어야 한다. 흔히 수필을 마음의 산책이라고 한다. 산책은 마음이 자유롭고 산뜻해야 좋은 산책이다. 산책 나가서 공연히 어려운 소리 한다던가, 자기 자랑 한다던가, 품격없이 시장바닥 이야기 하면 낙제다. 그런 데이트는 반드시 실패한다. 이런 수정 과정은 많이 거칠수록 좋다. 그래야 묵은 김치처럼, 오래된 포도주처럼 된다. 감칠 맛, 부드러운 향기가 생긴다.

 

 이 공정 거치면 마지막 옥을 다듬는 공정으로 가야 한다. 문장을 거친 끌로 파내어 다듬고, 부드러운 페이퍼로 갈아주고, 가죽으로 반질반질 광을 내며 다듬어야 한다. 흔히 글 만드는 작업은 뼈를 깍는 작업이라 한다. 구양수는 글을 지으면 벽에다 붙여놓고, 볼 때마다 고쳤는데, 완성되고 나면 처음의 것은 한 글자도 남지 않은 적이 많았다고 한다. 소동파는 적벽부(赤壁賦)를 지을 때, 그 글 초고가 수레 석대에 가득 했다고 한다. 두보는 시를 쓸 때, '나의 시가 감동을 주지못하면 나는 죽어서도 쉬지 않겠노라(語不驚人 死不休)'고 했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수필을 쓸 때, 고양이처럼 잡고, 암탉처럼 품고, 고등어처럼 요리하고, 과메기처럼 말리고, 옥처럼 광을 내라는 요구는 실로 간단한 요구일 것이다.

 세상에 글 만드는 일만 어려운 것 아니다. 부인들 장 담그는 일도 어렵다. 좋은 콩 사오고, 장작불에 삶고, 메주 만들고, 곰팡이 피우고, 장독 소독하고, 빨간 고추 숯 넣은 소금물 붓고, 햇볕 잘 드는 장독대에 올리는 일도 일곱번의 과정 거치지 않던가.

 

  끝으로 사족 하나만 단다면, 수필은 음주와 비슷하다. 취한 후에 노래가 나온다. 취해야 우물쭈물 하지않고 쉽게 무대에 올라가 한 곡 때릴 수 있다. 심지어 불러서 즐겁고 들어서 괴로운 지경까지 갈 수도 있다. 수필을  멀쩡한 생정신으로 노래 할려니 어렵고, 곡목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곡목은 사람마다 십팔번 있지 않은가. 뽕짝도, 샹숑도, 크라식도 있다. 심팔번은 남이 정해주는 것 아니다. 자기 부르고 싶은 노래 부르면 그만이다. 그걸 개성이라 한다. 수필은 온갖 경험과 사색과 정서를 믹스한 폭탄주를 자주 마셔야 잘 나온다. 흔히 이렇게 취한 사람을 작가라 한다. 

 

 

 쉽게 수필 쓰는 법

                                                                                                                            김창현

 

  수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쓰면 되는가. 여러 사람이 고민하는 것을 보았다. 은퇴 후 수필가란 것이 되자 나도 이 문제에 부닥쳤다. 그래 여러 수필 이론을 읽어보았으나 아하 이렇게 하면 수필을 쉽게 쓸 수 있겠구나 싶은 글은 없었다. 그래서 늦깍기 나름대로 쉽게 수필 쓰는 법을 좀 연구해보았다. 기존 이론서에 흔한 수필의 성격이니, 역사니 하는 것은 생략하였다.  

 

  隨筆은 글자 그대로 따를 수(隨)에 붓 필(筆)이다. 마음 따라 붓 따라 가면 된다. 그런데 글 쓸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숙제를 앞 둔 아이들처럼 마음은 딴 데로 가버린다. 머리 속이 하얀 백지처럼 비어버린다. 글이 나가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것이 문제다. 그 해결책이 무엇인가.

 

  우선 쓸 '꺼리'가 없는 사람은 고양이 쥐 잡는 모습을 한번 자세히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법 하다. 고양이는 항상 쥐를 노린다. 담을 넘어 쥐의 흔적을  살금살금 따라가고, 쥐구멍 앞에서 한없이 기다리기도 한다. 만약 우리도 고양이처럼 행동하면 어떻게 될까. 하루 24시간 마음 속의 수필 '꺼리'를 찾고, 쥐구멍 앞의 고양이처럼 신경을 집중하여 거기 매달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밤 중 자다가도, 새벽에도, 화장실에 앉았다가도, 버스 타고 다닐 때도, 일구월심 고양이 쥐 노리듯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리고 마치 고양이들이 쥐가 나타나면 앞발로 날쌔게 후려치듯이, 떠오른 생각을 즉각 메모하여 꼼짝 못하도록 메모하는 습관을 가졌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글감이 없다느니.여행을 가서 얻어와야 겠다느니 궁색한 소리는 전혀 필요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알다시피 인간의 머리는 컴퓨터보다 복잡하다. 수만가지 기억과 정서가 회로에 저장되어 있다. 아마 국립도서관 책 보다 많을 것이다. 세상에는 인간의 희비애락도 많고, 종교에는 고요하고 맑은 경지도 많고, 산수간에는 꽃 피고 새 울지 않는가. 쓸 '꺼리'는 너무 많다. 우리 마음 속 창고에는 옆 사람에게 할 말이 너무 많다. 독방이 감방에서 제일 괴로운 것은 옆에 말을 건넬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걸 메모하는 습관만 들인다면 일의 반은 해결된 것이다.

 

 그 다음은 암탉을 한번 살펴보자. 암탉은 비가오나 눈이 오나 소중히 알을 품는다. 친입자라도 나타나면 꼬꼬댁 꼬꼬댁 야단법석을 친다. 그러다 어느날 알 속에서 삐약삐약 병아리 소리가 들린다. 병아리는 곧 깃털이 생기고, 날개가 생기고, 아장아장 걸음마도 한다. 수필도 이와 같다. 좋은 소재를 메모했으면 다음은 암탉이 되어야 한다. 마음 속에 수필 소재를 사모치게 품고 다니면 신기한 현상이 일어난다. 생각이 점점 성숙해지는 것이다. 날개가 돋고, 삐약삐약 병아리 소리가 난다. 혹시 암탉을 잡다가 뱃속의 알주머니를 본 적 있는가. 크고작은 알이 줄줄이 달려있는 것을.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잡는 것이 수필 아니다. 떠올랐다 사라지는 생각을 고양이처럼 집요하게 움켜잡고, 암탉처럼 혼신의 힘으로 마음 속에 오래 품어 병아리로 만드는 게 수필이다. 수필 쓸려는 사람은 이런 크고작은 알주머니를 속에 줄줄이 달고 있어야 한다. 그  알주머니 속에서 큰 놈부터 차례로 나오는 놈이 수필 '초고' 이다. 이 초고는 엉성하거나 횡설수설이라도 상관 없다. 엉터리라도 상관 없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먼저 초고 한 편은 써놓고 볼 일이다. 그래야 일이 쉽다. 

 

 일단 초고가 완성되면, 그 다음 과정은 고등어 다듬듯 하면 된다. 도마에 올려놓고, 쓸데없는 비늘 벗겨내고, 꼬리 짜르고, 지느라미 짜르고, 내장 뽑아낸다. 생선으로 구울 것인지 짭짜롬한 냄비찌개 만들 것인지 결정 한다. 구울 것은 칼집 내고, 소금 치고, 어떤 불에 어느 정도 노릿노릿하게 굽는 것이 좋을까 궁리한다. 찌개꺼리는 고추 후추 양념도 칠 준비한다. 간을 어떻게 맞출지도 생각한다. 파도 넣고 생강도 넣어본다. 포도주도 좀 쳐야 잡냄새 없을 것이다. 양념 잘 쳐서 부드럽고 매콤한 요리 만들까, 살짝 쳐서 담백한 맛이 나게 할까, 그것은 각자 맘이다. 

 

  다음 과정은 과메기 말리듯 기다리는 과정이다. 건조대에 걸어놓고 해풍도 쐬고 눈도 맞혀서 몇번 얼였다 녹였다 두어둔다. 시간을 보낸다. 술 빚는 양조과정처럼 적당한 숙성이나 증류 또는 여과과정 거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다. 시간이 약이다. 문장은 항상 며칠 뒤에 보면, 수정하고 추가하고 삭제할 부분이 보인다. 주제가 제대로 전달된 것인지, 전체 배열이 자연스러운지 보아야 한다. 자연스럽지 않은 글은 죽은 글이다. 마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울어난 글이 좋은 글이다. 글이 길다 싶으면 짜르고, 짧다 싶으면 보태야 한다. 우물쭈물 주제 불분명한 글은 그 부분 때문에 글 전체를 죽인다. 옛날 사람은 글에 능한 것을 ‘좋은 글’로 여긴 것이 아니라, 쓰지 않을 수 없어 쓴 글을 ‘좋은 글’로 생각했다. 주제 불분명하고 우물쭈물 미사여구로 덮은 글은 문장의 독소다. 반드시 짤라내야 한다. 너무 딱딱하다 싶으면 몇대목 서정적인 표현도 넣어야 한다. 흔히 수필을 마음의 산책이라고 한다. 산책은 마음이 자유롭고 산뜻해야 좋은 산책이다. 산책 나가서 공연히 어려운 소리 한다던가, 자기 자랑 한다던가, 품격없이 시장바닥 이야기 하면 낙제다. 그런 데이트는 반드시 실패한다. 이런 수정 과정은 많이 거칠수록 좋다. 그래야 묵은 김치처럼, 오래된 포도주처럼 된다. 감칠 맛, 부드러운 향기가 생긴다.

 

 이 공정 거치면 마지막 옥을 다듬는 공정으로 가야 한다. 문장을 거친 끌로 파내어 다듬고, 부드러운 페이퍼로 갈아주고, 가죽으로 반질반질 광을 내며 다듬어야 한다. 흔히 글 만드는 작업은 뼈를 깍는 작업이라 한다. 구양수는 글을 지으면 벽에다 붙여놓고, 볼 때마다 고쳤는데, 완성되고 나면 처음의 것은 한 글자도 남지 않은 적이 많았다고 한다. 소동파는 적벽부(赤壁賦)를 지을 때, 그 글 초고가 수레 석대에 가득 했다고 한다. 두보는 시를 쓸 때, '나의 시가 감동을 주지못하면 나는 죽어서도 쉬지 않겠노라(語不驚人 死不休)'고 했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수필을 쓸 때, 고양이처럼 잡고, 암탉처럼 품고, 고등어처럼 요리하고, 과메기처럼 말리고, 옥처럼 광을 내라는 요구는 실로 간단한 요구일 것이다.

 세상에 글 만드는 일만 어려운 것 아니다. 부인들 장 담그는 일도 어렵다. 좋은 콩 사오고, 장작불에 삶고, 메주 만들고, 곰팡이 피우고, 장독 소독하고, 빨간 고추 숯 넣은 소금물 붓고, 햇볕 잘 드는 장독대에 올리는 일도 일곱번의 과정 거치지 않던가.

 

  끝으로 사족 하나만 단다면, 수필은 음주와 비슷하다. 취한 후에 노래가 나온다. 취해야 우물쭈물 하지않고 쉽게 무대에 올라가 한 곡 때릴 수 있다. 심지어 불러서 즐겁고 들어서 괴로운 지경까지 갈 수도 있다. 수필을  멀쩡한 생정신으로 노래 할려니 어렵고, 곡목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곡목은 사람마다 십팔번 있지 않은가. 뽕짝도, 샹숑도, 크라식도 있다. 심팔번은 남이 정해주는 것 아니다. 자기 부르고 싶은 노래 부르면 그만이다. 그걸 개성이라 한다. 수필은 온갖 경험과 사색과 정서를 믹스한 폭탄주를 자주 마셔야 잘 나온다. 흔히 이렇게 취한 사람을 작가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