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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이면사

김현거사 2011. 11. 16. 09:58

Re:이호철의 한국문단 이면사 <국제신문> (11--20회까지)| 종교/인물
나무꾼 | 조회 2 |추천 0 | 2004.06.09. 12:39
소설가 이호철의 한국문단 이면사 (11)

 
  경기도 군포시에 있는 이은상 시비.
그 여름 날 저녁의 취중몽사(醉中夢事)와도 같았던 그녀와의 단 한번의 정사가 그냥 그것으로만 끝났다면 뒤에 아무 탈도 없었을 것이다. 두 남녀 사이에서 그렇게 얼결에 벌어졌던 그 일을 피차의 가슴 속에만 깊이깊이 묻어만 두고 전혀 발설을 하지 않았다면 뒤탈이 날 건덕지라곤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산 이은상이라는 사람은 애당초에 그럴 수가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 일을 그냥 없었던 일로 파묻어 두기에는 노산의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를 않았다.



하여, 몇 달 뒤 친구가 돌아오자 노산은 자기가 저질렀던 그 일을 죄다 친구 앞에 털어 놓았다. 그 다음은 친구의 처분을 기다리는 일만 남아 있었다.



한데 그 때 그 친구도 자초지종 이야기를 다 듣고는 대뜸 말뚝 하나를 박듯이 잘라 말 하는데, 비록 낮으막한 목소리였지만 시퍼렇게 서슬이 서 있더란다.



“그런가. 그러면 더 이상 여러 소리 할 것이 없네. 오늘 부로 노산 그대가 저 사람을 데려가게, 저 사람을 맡게나.”



그리하여 노산도 별 수 없이 그 날로 그녀를 데려다가 그 뒤 평생을 바로 그녀와 해로를 하고 있노라던 것이다.



그러나 다만 그 일을 그렇게 겪고부터는 노산은 서울, 서울의 사람살이, 서울 바닥의 가파른 인간 관계에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져서 자기 삶의 터전만은 절대로 서울에 뿌리를 두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런 일환이었던 것이다. 노산이 서울의 문단 쪽과도 엄격하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것도 그 때 겪었던 그 충격의 연장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휠씬 뒤, 그이는 자유당 이승만 정권 때도 그랬지만, 제3공화국 박정희 대통령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 ‘새마을 운동’이나 그 밖에도 그 비슷한 여러 가지 사회운동, 문화운동에는 나름대로 열의를 내어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점 한 가지만은 끝까지 지켜냈다. 결코 서울에 터를 잡고 살지는 않았고, 서울의 인간 관계나 서울 쪽 삶의 행태와는 끝까지 일정한 거리를 견지했다.



그러면서도 노산의 우리나라 최고 권력 쪽과의 인연은 그이대로의 팔자소관이기라도 했는가. 초대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도 그러 저러하였으니, 그 점은 다시 뒤에서 짧은 삽화 한 토막으로 엿볼 수가 있으려니와, 그나저나 그 때 김 의원과 마주 앉았을 때 동아일보 사회면에 났던 그 기사는, 바로 노산의 그 막역지우와 그의 전처(현재 자신의 아내) 사이에서 태어났던 다 자란 딸 하나가 미국에서 자살을 했다는 기사였더라고 한다.



어떤가. 이거야 말로 또 거듭 충격이 아닌가.



하지만 그 일을 전해 들으면서 나는 흘낏 생각했었다. 그렇고 말고다, 한 세상 사는 것이 그 일도 그 정도로 그렇게만 끝날 리는 없고, 바로 그것이 씨앗을 이루어 그이는 그 딸 대(代)에서 다시 그렇게 운명의 화살 하나가 가슴에 꽂히듯 처절하게 갚았던 것이었구나, 하고.



그 때 과연 그 죽은 딸의 아버지는 어디서 새 여자와 만나서 어떤 삶을 살고 있었으며, 한 세상 살면서 겪는 그 모든 연계(連繫)를 이젠 그이도 노년으로 걸어 들었던 터이라, 어느 정도는 깜냥만큼으로라도 기별은 가 닿지 않았을까.



그렇다. 한 평생 살면서 그런 일이 그렇게만 끝났을 리는 결코 없는 것이다. 이래서 세상은, 이 세상에서의 한 평생 사람살이라는 것은 깊디 깊고도 오묘한 것일 터였다.



젊었을 적의 그 욱 하는 기분으로 이미 딸 하나까지 두었던 미녀 마누라를 내팽개치듯이 버리고 나서, 그이대로도 당연히 마음이 평탄할 리만은 없었을 것이고, 인생사 일반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골똘하게 생각은 해보았을 터이지만, 그이도 말년에 이르러서는 일말의 회한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살이에서의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이 그런 식으로 한 칼에 결판이 나는 것이 아닐 터이니까.



그렇게 바로 몇 십년 뒤에는 그 소생의 딸이 그 죄업을 몽땅 짊어진 채 자신의 업으로써 자살이라는 형태로 갚아냈던 것이 아니었을까. 세상 만사, 필경은 이렇게 허망한 것임을 그이도 뒤늦게서야 터득했던 것이 아닐까.
[2004/02/08 20:00]
소설가 이호철의 한국문단 이면사 (12)

 
  생전의 천관우씨
노산 이은상이 겪는 다음 삽화 한 토막도 당대 권력과 문학인과의 바람직한 관계가 과연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데 있어, 우리 후대 문학인들의 처신에서 명심해야 할 경종으로 받아들여야 할 우리 문단 이면사의 한 대목이 아니겠는가 싶다.



역사학자이며 언론인이었던 천관우가 조선일보 편집국장이었던 때였으니까 1950년대 말의 어느 날이었다고 한다.



편집국장 자리에 무심히 앉아 있는데 사장실에서 사환아이가 웬 문건 하나를 가져다 주기에 펼쳐본즉, 이승만 대통령이 손수 지은 한시(漢詩) 한 편이더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한글로 번역을 한 것인데, 역자는 바로 노산 이은상이었다.



순간 천관우는, 아니 노산께서 이런 일도 하는가, 하고 울뚝 노여움이 일었다. 그 동안 편집국장 자리에 있으면서 천관우는 노산이라는 사람의 남달리 결곡한 성품을 비롯, 널리 애창되며 회자되고 있는 ‘가고파’ 노래의 작사자로서도 마음 속으로 존경하며 신춘문예의 시 부문 심사나 그밖에도 새해 첫 날의 권두시 같은 것도 그이에게 부탁을 드리곤 했었는데, 바야흐로 지금 이 때가 어느 때인데 고작 이런 정신 빠진 짓이나 하고 있는가, 싶었다.



그 즉시 천관우는 ‘사직서’를 써서 편집국 사환 애를 시켜 사장실로 올려 보냈다. 그러니 사장실에서도 사장실대로 생난리가 났을 밖에.



결국 천관우는 사장실로 불려 올라갔고 꽝 하고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이 특유의 그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소리 질러댔다. 아니, 사장은 엄연히 사장이 할 몫이 따로 있을 것인데, 편집국장 할 몫까지 하려고 들려거든 편집국장이라는 게 이젠 이 회사에서 필요가 없을 것이니, 오늘 부로 소생은 물러가겠소이다…하고.



그러니 어떠 했을 것인가. 사장이고 사장실의 임직원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우선은 천관우의 우렁찬 수사자와도 같은 목소리와 특유의 큰 체구가 온통 불덩어리로 화한 듯한 기세에 그만 하나같이 압도를 당하였다.



이리하여 끝내 그 일은 천관우 뜻대로 일절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유야무야 끝나게 됐던 모양인데, 보기에 따라서는 자취 하나 남기지 않은 그야말로 일과성으로 흘러가 버린 하찮은 일에 불과했지만, 과연 긴 안목으로 볼 때도 그러할까.



바로 그 때 그 순간의 천관우는, 한 몸뚱이로 당대 이 나라 언론을 혼자서 떠메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야, 이승만 대통령의 한시 한 편이 지면에 실렸다, 안 실렸다, 하는 건 당시로서는 큰 대세와는 아무 상관도 없을 수는 있다.



그러나 1950년대 말이라는 그 막중한 때에, 언론인으로서의 천관우라는 한 사람이 혼자서 해낸 몫은 바로 이 나라 언론의 사활과 관련된 문제였던 것이다. 아니, 무소불위의 독재 권력에 당당히 혼자 맞서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남한사회에는 이런 사람 몇몇이 꾸준히 이어져 있었다는 것이 현 북한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그 뒤, 1960년대 70년대로 이어오며 장준하 함석헌도 대표적으로 그런 사람이었고 김재준 목사와 지학순 주교도 종교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천관우는 바로 그런 쪽으로 언론계, 그 중에도 특히 일간신문 쪽을 대표하는 사람이었거니와, 1970년대로 넘어 가면서 재야단체의 효시로 떠올랐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시절로 들어서면 천관우 그이는 한 때 명실공히 온몸이 불덩이로 타올랐던 것이다.



당시의 문단 원로 시인이었던 노산 이은상과 관계된 1950년대의 천관우의 삽화 한 토막을 소개한 김에, 1960년대 초 어느 날의 그이와 당시의 원로 소설가였던 월탄 박종화가 관계되었던 이야기 한 토막도, 우리 문단 이면사로서는 그런대로 뜻이 있을 것 같아 곁들여 볼까 한다. 이 이야기도 1972년엔가, 그이와 매일 같이 어울릴 무렵 직접 들은 것이다.

소설가 이호철의 한국문단 이면사 (13)

 
  월탄 박종화씨.
역시 천관우가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요즈음은 각계 각처에서 거의 매일같이 벌어질 정도로 흔해졌지만, 소위 세미나다, 심포지엄이다 하는 것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상륙하던 1960년대 초엽이었다.



마침 합천 해인사에서 1박2일로 정부 쪽에서 주최한 큰 심포지엄이 열려 당시 이 나라의 대표적인 명사들이 거의 빠짐없이 초청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우리 문단 원로였던 월탄 박종화도 응당 초청되었고, 천관우도 당시로서는 중견 역사학도에 조선일보 편집국장이라는 직함으로 그 자리에 말석으로나마 참여하게 되었다.



하여, 행사가 시작된 첫날 밤에는 모처럼 국내의 제제다사들을 죄다 한 자리에 모아놓은 것을 축하한다는 뜻으로 주최측에서 제법 호화판 술자리를 마련했던 모양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양주까지 등장을 하였다던가.



그렇게 모처럼만에 술판이 벌어졌는데, 이미 중년 고비도 넘겨 60대 중반으로 마악 들어섰던 월탄께서도 양주 몇 잔에 그만 훼까닥 취하여 게걸게걸 이 소리, 저 소리, 두서 없이 중언부언 하다가, 맞은 편 저 끝에 천관우의 얼굴이 보이자 느닷없이 지껄이더라는 것이다.



“암튼 이제 이 나라는 망했어. 망했다니까. 명실공히 이 나라 대표적인 대 신문사 편집국장이라는 자리에 천가 성 가진 사람이 앉았으니 더 이상 말해 뭣 해. 이제 나란 망했다니까굩”



순간 천관우는 거나하게 취기가 오르는 속에서도 아찔하더라고 한다. 바로 자신을 빗대고 하는 소리더라는 것이다. 아니, 빗대기는커녕 자신을 찝어내서 망신을 주자는 것으로 보였다. 바로 ‘천방지추마골피’, 항간에 더러 속설로 내려오던 이 나라의 소위 천한 성씨들을 염두에 둔 소리더라는 것이다. 내로라하는 이 나라 제제다사들이 한 사람 빠짐없이 죄다 모인 좌중 앞에서 대놓고 저런 소리까지 해대니, 그때 마악 30대 중반을 넘어선 천관우도 그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더라고 한다. 그리하여 천관우도 엉엉 울면서 저 앞 쪽에 앉아 있는 월탄에게 대어들었다.



“그러는 월탄께서는 양반입니까. 충신동 사시는 월탄의 조상들께서는 뭣 해 잡수신 분들입니까. 그건 세상이 다아 아는 일이올시다. 그렇소이다. 제 조상은 천짜, 만짜, 리짜, 천만리, 임진왜란 때 이 나라를 도와 주려고, 대국 중국에서 들어왔다가 그냥 이 땅에 눌러 앉은 분이올시다. 그래서? 대관절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천방지추마골피’라고요? 아니, 지금 이 나라를 어느 방향으로 끌어 가야 할 것이냐를 두고 논의를 벌이는 이런 막중한 자리에서 고작 그런 비속한 소리나 해대는 월탄은, 그래서 장안의 어중이 떠중이들이 존경해 마지 않는 봉속 소설가입니까요.”



이렇게 되자 술 자리는 금방 파장이 되었고, 월탄도 그제야 아뿔싸, 하고 후회막급이었으나 이미 때는 늦어 금방 토해낸 말을 도로 줏어 담을 수도 없게 되어 있었다.



이튿날 아침 월탄은 심포지엄 본회장에 들어서는 길에 천관우 쪽으로 슬쩍 다가와, 간밤에는 자기가 그만 양주 몇 잔에 취해서 헛소리를 했노라고 사과 비슷하게 한마디 하더라는 것이다.



그야, 천관우도 평소에 억수로 술 마시는 사람이라, 그런 정도의 월탄의 실수를 꼬옹하게 두고두고 마음 속에 담아둘 사람은 애당초에 아니었다.



“하지만 그 묘하더군.”



하고 천관우는 그 때로부터 10여년이 지나서 후일담으로 그 일을 나한테 사실대로 털어 놓곤 껄껄 웃으면서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입이더라고, 입. 하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는가. 그러니까 종당에는 매사 그날 그 날의 운 노름 같어. 운이 나쁘면 별일이 다 있는거야. 요는 그 날 월탄이 아주아주 운이 나빴던 것이지. 나도 그래. 그깐 일, 잊지, 잊어버리자, 하면서도, 그 뒤론 먼발치로 월탄이라는 사람이 보이기만 해도, 마음 한 구석이 찔끔 하면서 정면으로 마주 나서지를 않고 슬슬 피하게 되더라고. 그러고 보면 사람 한 평생 사는 것이 앞 뒤가 빠안한 국면보다는, 이렇게 가도 가도 모를 국면이 더 많은 것 같아요. 껄껄껄껄.”

소설가 이호철의 한국문단 이면사 (14)

 
  4.19 당시 부산진역 인근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막고 있는 모습.
이 나라의 1960년대는 바로 ‘4·19의거’로 열린다.



그리고 이 4·19의거는 바로 그 한 달 전의 ‘3·15부정선거’에서 비롯된다. 아니 더 엄밀하게 따지자면, 1952년 5월, 부산에서의 정치파동, 그리고 1954년 11월의 소위 변칙적인 ‘4사5입 개헌파동’ 등의 누적 위에 끝내 3·15부정선거에까지 이르러, 4·19를 기해 대거 민심이 폭발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우리 글 쓰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문단의 1960년대도 이 정치권의 소용돌이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을 수는 없었고 만판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다.



그건 너무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해 2월3일 정부가 정·부통령 선거 날짜를 3월15일로 공고한 뒤, 2월28일자로 대구에서 반정부 학생 데모가 터지며 저항의 첫 테이프를 끊는데, 그러나 3월15일의 선거결과는 투표율 94.3%에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기붕이었다.



그리고 그 당일에 마산에서는 야당 주도로 부정선거 규탄데모가 터지며 경찰서 등을 습격, 80여명의 사상자를 낸다. 3월24일에는 부산에서도 1000여명의 학생들이 항의데모를 벌이는 등 데모는 산발적으로 이어지다가 드디어 4월11일 마산데모에서 피살된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서 떠오르면서 다시 제2의 마산데모가 터진다.



이승만 대통령이 마산 사건 배후에는 공산당이 개입한 혐의가 있다며 난동자의 엄벌을 강조하지만, 그 닷새 뒤 18일에는 서울의 고려대 학생들이 종로 4가까지 항의데모를 벌이고 귀가하던 길에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40여명이나 부상을 당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이튿날인 19일, 서울 시내 대학생 2만여명이 한꺼번에 떨쳐 일어나는 큰 데모로 이어져, 사망 142명이라는 ‘피의 화요일’로 얼룩진다.



이렇게 온 나라가 ‘피의 화요일’을 향해 서슬 푸른 고빗길을 오르던 그 때에 과연 우리 문학, 예술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에 대한 궁금증을 간명하게 풀어주는 정경 하나를 소개해 보면 이렇다.



3·15 부정선거 열흘 전인 3월6일에 을지로 6가 서울운동장에서는 ‘이승만 박사 이기붕 선생 출마 환영 예술인대회’라는 것이 열린다. 불과 2, 3년 뒤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이정재 임화수 등의 주도로 열린 이 대회에서 이 나라, 문화예술인이라는 사람들은 잔뜩 주눅든 얼굴로 덜덜 떨며 하나같이 머리띠를 두른 채 “이승만” “이승만”, “이기붕” “이기붕” 하고 누군가의 선창에 따라 소리소리 질러대고 있었다면 곧이 듣겠는가. 그것도 백주 대낮에 서울운동장 한 가운데서.



그 때는 운동장의 사방 둘레도 엉성하기 짝이 없어 지상 전차를 타고 지나가던 시민들도 차창 바깥으로 그 광경을 속속들이 내다볼 수가 있었다. 그렇게 “저게 김승호다” “허장강이다” 하며 오직 저 유명한 배우들 실물들을 본 것으로만 요행을 삼아 탄성들을 내질렀다. 항간의 평균적인 보통 시민으로는 그 때가 바로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2000년대로 들어선 오늘에 서서 40여년 전의 그 때를 돌아보면, 원 저럴 수가 있었을까, 어쩌다가 우리 문화예술인들이 저 지경까지 떨어졌었을까 하고 의아해지지만, 그러나 1960년 3월의 우리 정황은 문화예술인들이나 지상 전차 속의 일반 시민들 수준이나 통틀어서 대강 그러했던 것이다.



나는 그 때 서울운동장의 기괴하기 짝이 없는 문화인 모임에 동참하지를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이렇게도 요행스러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때 내가 예술인대회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 나대로의 민주적 신념에 따른 것이었을까. 결단코 그렇지는 않았다. 단지 몰랐던 것이다. 누구 하나 미리 연락해 오지도 않았었다. 나도 이튿날의 신문을 보고서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던 것이다.



설령 문학인들 중에 그 대회에 한 둘 껴 있었던들 지금은 거의가 고인이 되어 있을 것이지만, 여직 살아 있더라도 그 때 그 일로 그 뒤 40여년 세월을 숨어서 숨죽이고 살아야 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때 그랬던 사람이 불과 몇 년 뒤에는 자기가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낯가죽 두껍게 매사에 잘난 척 하고 나서는 것은 보기에 민망스럽지만, 바로 그 일로 하여 그 뒤 평생을 기죽어 지내게 해서는 안된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자유세계를 표방하는 이 남한 사회의 넓은 ‘품’이기도 한 것이다.

소설가 이호철의 한국문단 이면사 (15)

 
  1960년 7월 3긿15 부정선거와 관련된 정치깡패들에 대한 공판이 열리고 있는 장면.
사실을 말하면 그 날, 3·15 부정선거 열흘 전인 1960년 3월6일, 지금 이 시점에서 돌아보면 실로 괴상하기 짝이 없는 그 ‘출마환영예술인대회’ 현장에 당시의 중요한 문학인들 만은 참가하지 않고 우물쭈물 유야무야로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그 행사의 주도 인물이었던 정치깡패 이정재 임화수가 저들 눈치껏 눈 감아준 덕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하면 아무리 무지막지한 저들이었지만, 저들도 저들 눈치만큼 당시의 우리 문학인들만은 영화인이나 연예인들보다는 한 급 높게 대접해 주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배후에는 1948년의 정부 수립 초창기에 경무대 공보비서였던 시인 이산 김광섭이나 공보처 차관이었던 소천 이헌구, 유엔 외교무대에 나섰던 여류시인 모윤숙 등의 유형 무형의 콧김과 신호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 해보라. 만일 그 자리에 당시의 명실 공히 대표적인 소설가 월탄이나 김동리 황순원, 역시 당시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노산이나 서정주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그 밖에도 모모하다는 시인 소설가들이 대거 끼어 있었다면 우리 문화계는 둘째 치고 그 뒤의 우리나라, 우리사회가 어떤 꼬락서니로 뻗어갔을 것인가.



바로 정치 권력과의 관계에서 이런 종류의 거의 선험적인 일정한 거리, 틈서리, 여유, 양식이야말로 해방 직후 38선이 경계가 되면서 남북한이 분단되고 나서 이 남한 문화계와 북한 문화계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경무대의 경호실장이었던 곽영주와 함께 권력 핵심부의 시녀로 떨어졌던 정치깡패 이정재 임화수도, 적어도 그 정도의 유연성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 경우는 유연성이었다기보다는 그들 나름대로의 정치적 감각이었을 것이다.



1960년 4월19일, 나는 아직 결혼 전의 총각으로 종로구 청운동 꼭대기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 무렵을 돌아볼 때마다 거듭거듭 기이하게 여겨지는 한 가지가 있다. 그건 뭐냐?



그 날 4월19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환하게 떠올릴 수가 있는데, 바로 그 한 달 남짓 전의 3월15일, 선거 날은 투표를 했는지 어쨌는지, 투표를 했다면 어느 누구에게 붓 뚜껑을 찍었는지, 그리고 종일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도통 새까맣게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 3·15선거에 대해서는 애당초에 이렇다 저렇다 할 관심조차 안가졌었던 것 같다. 뻔할 뻔자, 뻔한 놀음임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아예 나 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한가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 일은 그 당시 나는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소설가 오상원의 천거로 중앙청 공보실 조사과에서 간행되던 한 정기 간행물의 교정원으로, 이를테면 편집장 격인 오상원의 편집 보조원으로 하루하루의 호구를 해결하고 있었는데, 3·15선거 날이 임박해지면서 갑자기 주위가 삼엄해지고, 내 그 알량한 일자리도 아연 위협을 받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때 선거 임박해서 전성천이라는 목사 한 분이 공보실장으로 새로 부임해 와, 공보실 전 공무원의 성향 조사를 벌인다나 어쩐다나, 그리하여 야당 쪽 성향임이 드러나면 가차 없이 모가지를 자른다고 하여 한 때 공보실 안이 온통 공포로 뒤숭숭했던 것이다.



나야, 정식 공무원도 아니어서 그런 쪽으로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으나, 내 그 교정원 모가지나마 잘릴까 보아 덩달아서 덜컥 겁이 나, 새로 부임한 그 장관과 기맥이 통한다며 으시대던 조사과 과원 하나에게 나도 알게 모르게 아첨을 하며 본의 아니게 미태(媚態)를 보였던 일이었다.



대저 사람이란 살다가 더러 이런 경우에 닥치면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되기가 십상임을 절절하게 확인했었다.
소설가 이호철의 한국문단 이면사 (16)

 
  부산 임시수도 시절인 1951년 12월 27일 이 승만 대통령이 각부 장관에게 훈시하고 있다.
4·19의거가 일어났던 그 때로부터 꼭 37년이 경과한 지난 1997년 6월 하순 사흘 동안 나는 부산MBC의 모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모처럼 부산에 내려왔던 길에 나름대로 기이한 체험 두어가지를 또 맛보게 된다.

그러니까 1950년 12월에 북한의 원산에서 LST편으로 부산에 와닿아 피란민으로 2년간 몸 담았던 부산의 이 곳 저 곳을 찾아 텔레비전 촬영을 했던 것이어서, 초장면제소가 있던 초장동이 지금은 통째로 수성동으로 바뀐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수정동 피란민 수용소 자리며, 부산의 명물 40계단이며, 제3부두와 자유시장, 또 밀다원 다음으로 한때 피란 내려온 문화인들의 집합소였던 금강다방이나 미군 ‘재크’ 기관이 있던 동래 온천장 등을 두루두루 둘러보았다.

47년이라는 세월을 상거해 두고 시간이 엮어내는 기괴한 요술을 내 나름의 감회 섞어 양껏 맛 보았던 것이었다.

한 예를 들면 광복동의 원산 냉면집 맞은 편의 작은 골목길은 여전하지만 그 길로 마악 들어서서 금방 왼쪽에 있던 금강다방 자리는 현대적인 양장점으로 바뀌어져 있다는 식이었다.

그 옛날에는 문을 밀고 들어서면 바로 맞은 편에서 곱상하게 생긴 얼굴이 둥글둥글한 마담이 카운터에 앉아 반갑게 맞이 했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제3부두의 변화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부두 생긴 것의 기본 ‘틀’이나 널따란 창고들은 옛날 그대로였지만, 하역 인부들이 일하는 현장 분위기나 하역되는 물자들은 천지 차이만큼이나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창고 안이며 창고 바깥이며 부두 전체가 온통 바다 밖에서 들어오는 미군 레이션 상자들로만 가득 차 있어 발 들여놓을 틈도 없었는데 비해 지금은 대형 수출용 컨테이너들만이 부두 안에 가득하지 않은가.

하역 근로자들 분위기도 그 옛날에는 함경도 평안도 사투리가 횡행하는 햇내기 이북 피란민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데, 지금은 흰 파이버를 쓴 모습들이 제대로 하역 근로자다운 관록을 과시하고 있었다.

일당으로 받는 노임도 옛날 그때는 12시간 일하고 난장밥 두 끼니를 겨우 사먹을까 말까였는데, 작금에는 그 액수도 엄청나다.

부두라는 효용부터가 전량 전쟁물자 입항에서 근 50년이 지난 오늘에는 송두리째 수출 쪽으로 뒤바뀌어져 있었다. 그리고 대강 지난 50년 동안의 이 남쪽의 세상 변화가 이만한 수준의 진폭임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또 한가지 강한 인상으로 꼬나박혀 온 것은 토성동 한 구석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기념관이었다.

이 곳은 1951년 임시수도 시절의 대통령 관저이기도 했다는데, 첫 눈에도 몹시 초라한데 내심 놀랐다. 안쓰러울 정도로 도무지 볼 품이라곤 없었다. 1950년대의 사진 자료들이며 살아 생전에 그이가 썼다던 집기들이며 살림도구며 하나같이 지극히 가난하고 질박하며 검소했다.

그 건물은 1926년 일제의 식민지 시절에 당시의 조선 총독의 별장으로 지어졌던 것인데, 2층 왜식 기와집은 어언 70년이나 지났는데도 말짱했다.

하지만 우리의 초대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하필이면 왜놈 총독이 별장으로 쓰던 건물을 임시수도의 관저로 썼다는 말인가 싶어져 조금 의아해지기도 하였지만, 그런 것은 일단 접어두고, 우선 가장 놀라웠던 것은 4·19 학생의거로 권좌에서 쫓겨났던 이승만이라는 사람의 그 질박하고 조촐한 인간미였다.

그 점은 그가 썼던 집기 하나하나에서 그리고 아내였던 사람의 바느질 그릇이며 꿰매 신은 양말에서 약여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에 대통령이었던 그이도 이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구나, 하는 점만은 살갑게 와닿던 것이었다.

그 점으로 말 한다면, 그렇다굩 그이 이승만에게 친자식이 없었다는 것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는 큰 요행이었다.

월맹의 호치민(胡志明)이 바로 그러 했듯이 말이다.
소설가 이호철의 한국문단 이면사 (17)

 
  생전의 조연현씨.
해방 후 좌·우로 격돌이 벌어지던 때, 우익 문화계 쪽의 최전선은 주로 당시의 ‘청년문협’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주요 면면은 김동리 조연현 곽종원 서정주 박목월 조지훈 등이었다.

그 보다 조금 선배 격으로 소위 30년대의 김광섭 이헌구 변영로 모윤숙 등 해외문학파가 있지만, 그이들은 앞에서도 잠깐 비쳤듯이 대한민국 정부가 마악 수립되면서 관계나 유엔 외교 쪽의 큰 마당으로 진출한다.

결국은 좌익 문인들이 대거 월북한 뒤의 남한 문단을 주로 이끌어간 것은 월탄 박종화를 비롯해 김동리 조연현 곽종원 등 ‘청년문협’이 맡아낼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렇게 1949년에 월간으로 ‘문예’ 잡지가 명동의 현 롯데백화점 앞 남대문로 맞은편의 문예빌딩에서 창간되는 것이다.

일설에 이 문예빌딩은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이 모윤숙에게 문인들 용으로 주었다는 소리도 있는데 정확한 진위는 알 수 없다.

문학잡지라는 것이 우리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출범하게 되는데, 모윤숙 사장에 김동리 주간, 조연현 편집장 등으로 진용이 채워지지만, 모윤숙은 원체 유엔 외교 등으로 바빠 이름만 사장일 뿐이지 거의 자리를 비워 자연 김동리 조연현이 맡아 일을 해낸다.

그러다가 금방 6·25전란이 터지고, 북한군이 서울을 3개월간 점령, 갖가지 난리법석을 겪은 뒤에 9·28 국군수복으로 또 한번 소용돌이를 치르며 1·4 후퇴로 임시수도는 부산으로 옮겨진다.

그렇게 임시수도 시절의 밀다원, 금강다방으로 문단이 이어지고 ‘문예’ 잡지도 두 달, 혹은 세 달에 한번씩일 망정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 때도 그 잡지를 틀어잡고 해내는 것은 함안(咸安) 사람 조연현이었다.

여기서 굳이 그이의 고향인 함안을 내세우는 이유는 나대로 없지 않다.

조연현이라는 사람의 매사에 빈 틈 없는 일처리 능력을 돋보이게 하려는 생각에서다.

예부터 함안 사람이라면 그 인근에서는 알아준다던 것이었다.

언젠가, 우스개 소리 삼아 들은 이야기거니와, 진주 형무소엘 어쩌다 가 보면 거기 수감되는 인원의 반수 이상은 예외 없이 함안 사람이라던가. 함안 사람은 그렇게 독종이 많고 매사에 특출하다는 것이었다.

우리 문단으로 보더라도 초창기의 ‘문예’, 그리고 그 뒤로 1955년 1월로 시작되는 ‘현대문학’을 이끌어 가는 것도 바로 함안 사람 조연현이었다.

그 조연현의 뒤로 문인협회, 펜클럽 등을 좌지우지하며 이끌었고 시단의 한 귀퉁이를 ‘시문학’지를 통해 꾸준하게 감당해온 문덕수도 그러고 보면 함안 사람이었다.

우리 문단을 한 가운데서 이끌어온 주축이 그 무렵의 김동리와 조연현이었지만, 해방 정국 속의 좌·우 싸움과 그 연장으로 벌어졌던 6·25동란 속의 우리 문단도 그들 청년문협 멤버들이 전체 분위기를 장악하였으나, 그 주변으로 여러 갈래의 움직임들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실 살아가는 세상이 으레 그렇듯이 응당 그랬을 터이다.

가령 염상섭 같은 작가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이는 해방 정국 속의 우리 문화계에서 좌·우 싸움에 전혀 휘말려 들지를 않았다. 당시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으로 언론계에 몸담고 있어 문학계의 좌·우 싸움에서는 일정한 거리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뿐 아니었다. 김동인 채만식 같은 그 당시의 중진급 작가들도 좌·우 싸움의 회오리에서 한 발 떨어져 있었다. 물론 그이들의 작가 성향이나 작품 경향으로 보아서 그런 싸움에 대해 대강 어떤 시각을 가졌겠느냐 하는 것은 짐작할 수 있지만, 월탄 박종화 말고는 주역 자리에서 조금 비켜 서 있었던 것이었다.

실은 월탄까지도 동리나 조연현의 권고에 따라 자의반 타의반 그 젊은 패거리에 업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부산에서의 피란문단도 비록 몇 달씩 거르면서 띄엄띄엄이라도 끊이지 않고 나오던 ‘문예’ 잡지를 중심으로 한 밀다원, 금강다방 시대로 존립하고는 있었지만, 그 외곽 비슷하게 부산이나 마산 진주 통영 등지의 토착그룹은 그룹대로 살아 있었던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부산으로 말한다면 향파 이주홍이나 요산 김정한이었다.
소설가 이호철의 한국문단 이면사 (18)

 
 
 
1906년 합천에서 태어났던 향파 이주홍이나 1908년생이던 요산 김정한은 원체 그쪽 본 고장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피난수도 부산에서도 각자대로 생업을 갖고 저들 삶을 살아갔을 뿐이지, 1·4후퇴로 우루루 서울 쪽서 내려온 소위 문화인들 모임인 '모나리자'니 '금강'이니 하는 다방을 중심으로 한 하이칼라 판 쪽에는 전혀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당연히 그랬을 터이었다.

1951년부터 53년 휴전이 이루어져 환도하기까지 어쨌거나 하나밖에 없던 문학잡지 '문예'지는 임시수도 부산에서도 한 두달씩 걸러 가면서일망정 띄엄띄엄 동리 조연현 등에 의해 명맥은 이어가지만, 이주홍이나 김정한은 그 쪽 하고는 별로 상종하지 않았다.

그 때로부터 어언 반세기가 넘은 작금에 와서 그 이유를 가만가만 생각해 보면 그런대로 납득이 되는 면도 없지가 않다.

실제로 향파 이주홍이나 요산 김정한은 1920년대나 30년대부터 줄곧 부산에 살면서 일찍부터 이름이 알려졌었고 문단적 위상도 그런대로 굳건하였지만, 해방 직후의 좌·우 대치 국면의 정국 속에서는 여운형이 이끌던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쪽으로 연을 대고 있었던 것이었다.

향파나 요산이나 1920년대, 30년대 무렵에는 경향파 쪽으로 조금 가까웠었거나 문학 성향 면에서 토종 민중의 대변자로 자처했었다. 특히 말년까지 향파와 같이 어울려 지냈던 시인 박노석 같은 분은 아나키스트라고 스스로도 굳건히 자처하고 있었던 것이어서, 월탄 모윤숙 동리 조연현 등이 이끄는 문학 이념을 당시의 한국민주당이나 이승만의 극우 노선의 일환으로 껄쩍지근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긴 월탄이나 동리를 꼭 극우 노선으로 보는데는 문제가 없지 않을 것이다. 동리와 김동석의 문학논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당시의 저들은 딱히 이념적으로 좌·우 개념에 매이기보다는, 단지 문학의 독자성, 정치적 파당성이나 공산주의적 선전 수단으로 떨어지는 문학에 대한 격렬한 반대 입장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좌·우 대립이 차츰 격렬해지면서 그에 따라 우익도 우익대로 자연스럽게 극우로 치닫는 국면에서는 여운형의 '건준' 노선이라는 것도 겅중 허공에 떠갈 밖에 없었고, 따라서 향파나 요산은 일거에 자신들의 터전을 잃어버렸으나 그렇다고 기신기신 동리 조연현 휘하로 들어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점으로 말한다면 어찌 향파나 요산 뿐일 것인가.
 

대구의 이영도 시인의 친 오빠였던 시인 이호우나, 진주의 미남자 시인이었던 신석정도 바로 그런 측에 속했다. 그이들 입장으로 볼 때는 서울 쪽의 그 한국민주당 계열의 월탄 모윤숙 동리 조연현 등의 그러저러한 자태들이 아니꼽게도 보였을 것이었다.

대체로 그이들은 해방 직후의 '건준' 노선으로 일괄해서 묶을 수가 있을 것인데, 박헌영의 극좌 노선이 부상하고 그렇게 극좌와 극우가 정면으로 맞붙는다. 거기다가 북한까지 껴들면서 끝내 6·25까지 이르게 돼 그들은 송두리째 저들이 본래적으로 지녀왔던 그 터를 말짱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 무렵에도 임시수도 부산으로 말한다면, 통영에서 한 때 이름을 날렸던 유 약국집 아들, 청마 유치환만은 줄곧 부산에서 여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여학생 제자들이나 여류시인 이영도와의 사연으로 화제를 뿌렸다. 그이는 그 약국에서 어릴 때부터 그런 쪽의 좋은 보약을 수시로 먹어서 그렇게 '물건'이 좋았을 것이라든가, 그런 풍문도 그냥 허튼 소리만은 아니었을 성 싶다. 그 유치환만은 부산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동리 조연현 서정주와 함께 그 '청년문협'의 핵심 멤버였지만, 본시 어디서나 과묵하고 잘난 척하고 나대는 성격과는 원체 거리가 멀어서 최일선에는 나서지 않았다, 뿐이었다.

1958년인가, 나는 그 해 가을 어느 날 청마를 딱 한번 가까이 뵌 일이 있었다. 모처럼 그이께서 상경을 했을 때였는데, 바로 그 무렵에도 왕년에 '문예' 잡지사가 있던 문예빌딩 지하실인 '문예쌀롱' 다방이 그 당시의 문인 집합소였는데, 조금 이른 저녁이어서 아직 문인들이 대거 나오기 전이었다. 그 때 나는 동리의 권고로 그 무렵 현대문학사에 근무하던 시인 박재삼과 함께 넷이서 명천옥의 아래층 방에서 막걸리 몇잔을 나누어 마셨었다. 그 때 본 것이 가까이 청마를 본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시종 동리가 지껄일 뿐, 청마는 덤덤하게 듣기만 하였고, 도통 재미가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소설가 이호철의 한국문단 이면사 (19)
해방직후 '통영문화협회' 문화계에 통렬한 비판 쏟아
김춘수 · 전혁림 등 예술가로서의 위상 높아
시인 이정호 부친도 눈길 … 인재에 거금 쾌척

1950년대의 우리 문단을 생각할 때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나도 1950년대 중엽에 돌체다방에서 낯을 익히고 몇번 만나 보았지만 그에 대한 내력을 2000년대 들어선 최근에야 풍문으로 들어 알고 내심 놀랐었다.

바로 시인 평계(平溪) 이정호가 그렇다. 지금 살아 있으면 80도 휠씬 넘었을 것인데, 갸름한 얼굴에 귀공자 풍으로 생겼던 사람이었다. 조금 활달했던 사람으로 돌체다방에 마주 앉아 나름대로의 시론 같은 것을 도도하게 펴던 모습이 기억에 남았을 뿐, 어떤 시 작품이 그의 대표작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문단이면사를 거론하는 이 자리에서 느닷없이 이정호라는 시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이의 선친(2대 국회의원도 지낸 이시목)이 일제 하 식민지 때를 살아냈던 자취가 만만치 않게 크고 우람했었다는 점을 음미해 보기 위해서다.

바로 그 이정호의 선친은 경남 의령의 몇만석 대지주였다고 하는데, 그이는 일찌기 의령 고을에 태어났던 수재들인 이극로와 안호상을 1930년대에 독일 베를린으로 유학을 보냈다. 신성모도 영국 상선(商船)학교로 유학을 보냈었다고 한다.
 
  윤이상

아시다시피 이극로는 해방 뒤 일찌감치 월북한 한글학자이고, 안호상은 우리 철학계의 거목으로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했다. 신성모도 참모총장에 국방부장관까지 역임했던 사람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정호의 선친은 일제 암흑기에 자기 고을의 싹수 있는 재목을 그렇게도 날카롭게 보아냈었다는 형안(炯眼)이 돋보인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몇 만석에 달하는 거부가 한 두 사람이 아니게 많았으되, 그 재물을 이 이상으로 효험있게 쓴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 신통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초대 수도청장을 지냈던 장택상도 그런 거부의 친자식이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거니와, 이정호의 선친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 자기 고을 안에서 그 셋을 쪽집게로 집어내듯이 골라 거금을 흔쾌히 투척했던 것이었다. 이 점은 훨씬 세월이 지난 현금에 와서도 우리 후대들이 차근차근 챙겨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해방 직후의 우리 문화계 움직임으로 또 한가지 돋보이는 사실 한가지가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별 것이 아닐 수도 있는 '통영문화협회'라는 모임이 그것이다. 그 모임의 주요 면면들을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 와서 돌아보면 역시 만만치 않게 곱씹어 볼만하다.
 
  김춘수

모임에는 시인 김춘수와 미술가 전혁림, 그리고 음악인 윤이상이 들어 있었고, 그이들보다 조금 연상인 청마 유치환과 초정 김상옥도 이따금씩일망정 얼굴을 내밀었다고 한다.

그 모임이 어떻게 생겨나서 언제까지 이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면면으로 본다면 시인 김춘수와 미술가 전혁림, 그리고 멀리 독일에서 고향을 그리워만 하다가 끝끝내 이국 땅에서 이승을 마감한 윤이상, 이 세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예술가로서의 오늘의 위치나 위상을 떠올릴 때, 오늘의 우리 문화계 정황에 대한 나름대로 통렬한 화살 하나가 있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예술 하는 사람들의 제대로 된 모임이라는 것은 본래적으로 저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비판적 화살이 그것이다. 오늘 우리 문화계의 협회다, 단체다, 하는 것들의 잡박한 난립은 문학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타락과 부패를 부추기는 쪽으로만 극성들을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

1980년대 언젠가, 김춘수가 독일에 갔던 길에 윤이상을 만났더니 한 때 한 동아리의 동인이던 김춘수를 끌어안고 "춘수야 정말로 고향 땅 한번이라도 밟고 싶다"고 하소연을 하여 돌아와서 당국에 사실대로 알려 시도를 해보았지만, 여론이 안좋다며 '불가' 판정이 나더라는 것이다.

그 무렵 통영 시절의 청마는 어쩌다 눈이 오면 반드시 김춘수에게 전화를 걸어 "가슴에 불이 나서 미치겠다. 어디 좀 걷자, 걷자"고 소리소리 질러대곤 했다던 것이었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예술가들이란 이렇게 별난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윤이상도 본시 초등학교밖에 안나온 사람이었으며 그럼에도 음악적 소양은 그렇게도 높았었다고 한다.
소설가 이호철의 한국문단 이면사 (20) 피란 문인들 종군작가단 결성

 
1950년대의 임시수도 부산에서의 우리 문단은 서울에서 1·4후퇴로 피란 내려온 문인들 모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 대구는 어떠했을까.

바로 대구 뒤쪽은 말 그대로 하루하루가 한 치 땅을 두고 밀고 당기는 격전지여서, 겨우 하루를 넘기면 그 다음 날은 어떤 운명의 회오리에 휘감겨 들는지 어느 누구도 예단할 수 없는 살얼음판 같은 나날들이었다. 그 무렵의 현지 문인들 움직임을 시인 박훈산은 살아 생전의 잡문 하나로 대강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

공군종군작가단이 처음 결성된 것은 1951년 1·4후퇴 직후였다고 한다. 태반이 서울에서 내려온 피란 문인들로서 당시 공군 정훈감이었던 김종완 대령이 산파역을 맡았었는데 단장은 마해송, 부단장이 조지훈, 사무국장이 최인옥이었다. 그리고 단원은 최정희 곽하신 박두진 박목월 김윤성 유주현 이한직 이상로 방기환 김동리 황순원 박훈산 등이었다. 다만 김동리 황순원은 부산에 살면서도 회원 자격은 부여받고 있었던 것이다.

 
  구상 시인
공군종군문인단(창공구락부)보다는 조금 늦게 1951년 5월26일에 대구의 아담(雅淡)다방에서 육군종군작가단이 결성되는데 단장에는 최상덕, 부단장에 김팔봉, 그리고 회원으로는 구상 김송 장덕조 최태응 김용환 정비석 김진수 박영준 김리석 양명문 김동진 장만영 박기준 박귀송 김영수 성기원 이덕진 유치환 이호우 등이었다. 그밖에 최재서 양주동 이상범 이서구 김요섭 김종삼 김종문 홍성유 임옥인 이원수 전봉건 장철수 왕학수, 그리고 이봉구 박인환은 대구 부산을 부지런히 오르내렸다. 그때 이봉구는 어느 신문의 기자로 근무했다던가.

그 창공구락부의 사무국은 대구 덕산동의 2층 방에 들어 있었는데, 마해송이 영남일보사의 조그만 문간방 하나를 애걸애걸하여 겨우 얻어 연락사무국으로 쓰고 있어, 대낮부터 문인들은 그 방에 몰려들어 법석을 피웠다고 한다.

그렇게 저녁이 되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감나무 집'이거나 '석류나무 집', 아니면 '말대가리 집'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고 한다. '석류나무 집'은 그 당시 대구의 동성로에 있었는데, 주모 아주머니는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고 무척 후덕하였다. 마해송 조지훈 최인욱 구상 김윤성 박훈산 왕학수 박기준 강철수 등이 이집의 단골이었다.

 
  천상병 시인
마당이 원체 넓어서 봄 가을 여름이면 멍석 위에 둘러 앉아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통음을 일삼았다고 한다. 그 댁 마당 끝에 아직 석류도 열리지 않는 애송이 석류나무 한 그루가 있어 누군가의 제의로 자연스럽게 그런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어느 날 저녁에는 불현듯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이 나타났다. 그이는 공군종군문인단원들을 한번 뵙고 싶은데, 공군본부로 나오라기엔 예의가 아닌 듯 하고 어디 그럴듯한 식당 같은데서 만났으면 한 대서, 뭐 그럴 필요가 있느냐, 조금 누추하지만 매일 문인들이 술타령으로 일삼는 '석류나무 집'으로 나오면 되지 않느냐, 그렇게 같이 막걸리 잔이라도 주거니 받거니 하는 편이 낫지 않느냐 해서 그이도 흔쾌히 응낙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이도 속 편하게 평상복 차림으로 나와서 그날 밤 늦게까지 막걸리를 퍼마셨는데, 그 술집의 안주인은 물론이고 그날 저녁 한자리에 있었던 태반의 문인들도 뒤에서야 그이가 바로 공군참모총장이라는 것을 알고는 죄다 놀랐다고 한다.

이보다 몇 년 뒤가 되지만, 1956년 12월26일 저녁에는 부산 광복동 사잇길의 귀원다방에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30주기를 추모하는 조촐한 모임이 열린다. 이 모임은 '신작품' 동인이 주관했는데, 그 면면은 김성욱 천상병 고석규를 비롯, 손경하 하연승 유병균 송영택 조영서 등 주로 젊은 20대들이었다고 한다.

특히 이 자리에는 모처럼 김춘수가 참석, 모임을 무척 빛냈다고 이미 반세기가 지난 그때의 일을 시인 조영서는 추억하고 있다.

한창 전쟁 중이던 1951년 그 무렵의 대구 쪽 문인들 움직임 속의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들도 이 글을 접하면서 각자 나름대로 일말의 감회를 안 느낄 수 없을 것이지만, 실제로 세월 흐르는데 따라 그때 그때의 문인들 명망이라는 것도 한낱 꿈결 같은 것임을 곱씹게 된다. 1950년대 그 무렵 20대 신인으로 촉망되던 고석규도 서울대학 영문과 출신의 최승목과 함께 새삼 머리 속 한 구석을 스쳐가지 않을 수 없다.

[2004/04/06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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