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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현의 수필

김현거사 2022. 8. 3. 06:46
김창현의 수필


두류동의 이틀 밤
                                                                                                                           
 
두류동에 사는 친구 집은 빈 농가를 빌린 것인데, 금 간 벽 황토 바르고, 찢어진 창문 한지 발랐더니, 방이 인물 훤하다. 폐교에서 구한 난로 가져다 놓았더니, 산에 지천으로 많은 게 소나무 아닌가. 관솔 타는 향 좋고, 고구마 익는 냄새 근사하다. 집이 초라하니 별이 지붕 위에 아예 수를 놓는다. 공해 없는 곳은 꽃빛이 곱다. 꽃이 그럴진대 사람은 어떨까? 이것이 틈만 나면 내가 지리산을 찾는 이유다.
밤에 명상에 잠겨 보았다. 어둠 속의 산은 고요한 선방(禪房)이다. 바위는 묵언의 참선객 이다. 바람소리 물소리는 범패(梵唄)다. 흔들리는 풀과 나무는 바라춤 무용수다. 지나가는 달과 별은 나그네다. 산이 입선(入禪)의 경지 보여준다. 청산을 바라보면 나뭇잎은 살랑살랑 흔들리고 구름은 흘러간다. '꽃 피고 새 우는 경지' 읊은 고승의 선시(禪詩) 같다. 이것이 틈만 나면 내가 지리산을 찾는 이유다.
새벽에 일어나니, 찔레꽃 만발했는데 어디선가 산비둘기 울고 있다. 우리는 아침 상을 바위 위에 채렸다. 천왕봉 빤히 올려다 보이는 그 넓적 바위는 위가 평평하여 칠팔명 앉을 수 있다. 원래 신령한 방장산에선 풀뿌리 나무뿌리를 캐어먹어야 제격이다. 식탁에, 깻잎, 당귀잎, 고구마, 감자, 방울토마토, 요구르트와 꿀이 올랐다. 아카시아 꿀은 부드럽고 향기롭다. 당귀는 향이 그리 화사할 수 없다. 삼채전도 지져먹었다. 삼채는 히말라야 1400 이상 고지에서 자라는 식물로 인삼보다 게르마늄 성분이 많고, 마늘보다 천연 식이유황(MSM) 성분 여섯 배 많다. 잘게 썰어 넣은 흑돼지고기 고소하고, 감자는 사근사근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우리는 이를 선식(仙食)이라 불렀다.   


 
식사 후, 서울서 가져간 꾸지뽕과 가죽나무 묘목 심었다. 꾸지뽕은 당뇨에 특효이고, 가죽 자반은 경상도 사람이라면 죽고못사는 귀한 먹거리다. 남명선생은 두류산 양단수에 도화 뜬 맑은 물을 읊었다. 작년에 심은 복숭아나무는 이제 복숭아가 달렸다. 산 속에 선도(仙桃)가 익어갈 생각만 해도 즐겁다. 


같은 약초도 지리산서 자라면 약효가 강하다. 그래 허준과 유의태 선생이 산청에서 살았을 것이다. 몸통에 주름 잡힌 3년 근 인삼을 심었다. 금년에 꽃 피고, 빨간 열매 맺힐 것이다.  열매는 새가 먹고 마음 내키는 대로 날아다니다 배설할 것이다. 새야 어딘들 못 날아 가랴. 지리산 이쪽저쪽에 애기삼 번질 생각만 해도 기쁘다. 


 
이 날 우리는 산 속 여기저기서 약초를 캤다. 우리가 흔히 보는 자줏빛 엉겅퀴 뿌리는 정력 허실 한남자의 보약이고, 도시 주변이나 길 옆, 더러운 물 흐르는 수채 주변에서 흔히 자라는 돼지풀이라 부르는 소루쟁이는 염증이나 암에 특효약이다. 발에 자주 밞히는 질경이는 이뇨에 좋고 혈압 내려주는 약이다. 산에 지천인 산죽(山竹)은 당뇨 특효약이다. 
되는 놈은 나무 하다가도 산삼 캔다. 근처에 자주달개비꽃이 많다. 보라빛 그 꽃을 컨테이너 근처에  심었다. 두류동 계곡은 골짝골짝마다 진달래 붉다. 꽃이 날더러 무릉도원에서 살자고 유혹하는 산골의 새악씨 같다. 이런 낙원 외면하고, 꽉 막힌 창고칸 같은 호텔방 선호하는 사람들 뜻을 나는 모르겠다. 
오후에 샤워장 하나 만들었다. 대나무 홈통으로 물줄기를 끌어왔다. 약수로 등목을 치다가, 팬티까지 홀라당 벗고 은밀한 곳을 세상 구경 다 시켜주었다. 바람은 저 아래 구절양장 구부러진 골짜기에서 불어온다. 우리 나체를 살랑살랑 쓰다듬고, 천왕봉으로 올라간다. 짹짹!  새만 날아다니면서 우리 물건을 볼뿐, 아무도 보는 이 없다. 
저녂엔 생강나무 잎으로 쌈 싸 먹고, 줄기는 난로 장작불에 올려 차를 끓였다. 제피 부드러운 잎은 튀겨먹었다. 향긋한 제피 튀김에 삼천포 민어 조기의 고소한 배합을 속인들은 모를 것이다. 거제와 남해 두 섬에서 교편 잡았던 오태식 교장은 거제의 알짜배기 대구 고니와, 대구뽈찜 이야기, 남해 갈치 회와 개불 맛, 금오산 밑 동네 전어 이야길 청산유수 읊는다. 그를 높이 치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을 제 철에, 제 장소에 가서, 제 값에 음미한 점이다.
해 지자 달 솟아온다. 단소 꺼내놓고, 시조 창 듣는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거기 내지르는 오교장 창 일품이다. '산촌(山村)에 밤이 드니 먼딋 개 즈져온다. 시비(柴扉)를 열고 보니 하늘이 챠고 달이로다.' 최상무는 단소로 '청성곡(淸聲曲)'을 분다. 그 소리 푸른 산마루에 백학이 날아가는 것 같다. 국창 안숙선 씨 남편답다.   
신선이 연꽃 등잔에 관솔불 밝히고, 파초잎 술잔으로 죽력주(竹瀝酒) 마시는 경지가 이럴 것이다. 옥향로에 향 피우고 하늘에 제사 지낸 밤이 이럴 것이다. 


다음날 새벽에 산 속을 거니니, 천왕봉은 얼굴을 흰구름으로 씻고 있다. 사람이 배울 것은 저 맑은 얼굴이다. 물소리와 구름 속에 몇 천년을 앉아있으면 저런 얼굴이 될까. 
두류동에서 이틀 밤 이렇게 보내고, 하산하여 경호강 따라 내려가니, 함초롬히 이슬 젖은 절벽에 두견화가 보인다. 꽃빛이 하도 고와 차라리 슬프다. 간밤 두견새는 저기서 밤새도록 서편제 토하다 갔을 것이다.
지리산은 온갖 영초에 덮힌 산이다. 생초쯤에서였을까. 상경하는 차 속에서 안개 덮인 산을 되돌아보았다. 내가 지금 뭐하러 공해에 덮힌 서울로 가고 있나. 차를 돌리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다.
(2015년 4월 월간문학)






답산(踏山)의 의미 




등반 등산 산행 답산이란 말이 있지만, 여기선 답산이란 말을 쓰기로 하자. 시서(詩書)를 농(弄)하는 데도 법이 있으니, 선비의 답산에 법이 없겠는가. 나는 그 법을 산수화 이론서에서 찾았다. <개 자원 화전>에,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는 말이 있다. 산수(山水) 속에서 그럴듯한 풍경을 찾고, 시를 찾는 것이 선인들 답산의 의미일 것이다. 그래 화론(畵論)에 구체적으로 나오는 안개나 물, 바위와 나무, 산길 등에 대한 이론들을 유심히 읽어보았다.
 
안개를 주목해야 함은 명백하다. 산도 안개 속의 산이 더 신비롭다. 산이 미인이라면 안개는 미인의 얼굴을 가린 스카프다. 먼 산 아지랑이처럼 신비로운 것도 없다. 산을 볼 때는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주산(主山)은 높이 솟아야 좋고, 구불구불 연결되어야 좋고, 세(勢)가 우람한 기상이 있어야 좋다. 뾰족한 것을 봉(峰)이라 하고, 둥근 것을 만(巒)이라 하고, 서로 연(連) 한 것을 영(嶺)이라 하고, 절벽에서 오랜 풍설에 닦이고 씻겨져 납작하게 튀어나온 바위를 파(坡)라 하며, 산 사이에 끼어 흐르는 물을 간(澗)이라 한다.
 푸른 산에 백운이 걸치어 층을 이루어 산을 가로막고, 구름이 열린 곳에 창천(蒼天)이 나타난 모습을 운산(雲山)이라 하고, 나무가지 사이에 안개 덮인 것을 운초(雲梢)라 한다. 어쨌든 구름과 안개는 산에 비단옷 입히는 시인이다. 아침에 이내가 끼고, 저녁에 노을이  낀 것을 도연명은  '산기 일석가(山氣日夕佳)'란 구절로 표현했다. 산 기운은 아침저녁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안개와 노을이 산을 더 신비롭게 만든다.


그다음에 주목할 것은 물이다. 바위를 안고 흐르고, 나무를 감돌아 흐르고, 폭포를 이루고, 쏘가 되기도 하는 것이 물이다. 물은 나무를 적시고, 바위를 적시고, 다람쥐와 청설모 같은 산짐승의 목마름을 해갈해준다. 천지를 적시고, 만물을 함양(涵養)한다. 물소리는 자장가처럼 다정하기도 하고, 가늘게 흐느끼기도 한다. 마침내 집채 같은 바위를 흔드는 우뢰 소리로 변하기도 한다. 이 물소리를 불가에서는 팔만사천 법문이라고 하고, 부처님 장광설(長廣舌)이라고도 한다.


 


 


산에 가서 하루 종일 물가에 앉아있어도 탓 할 이 없다. 약수도 한 모금 마셔보고, 시원한 물에 얼굴도 씻어봐야 한다. 폭포와 쏘도 눈여겨보아야 하고, 물에 비친  바위와 나무와 흰구름도 유심히 보아야 한다. 조용한 물소리와 시원한 바람소리 들으면서 차나 시주(詩酒)를 즐기는 운치도 잊어선 안 된다. 그런데 산에 와서, 마치 마라톤을 하듯 열심히 꼭대기로만 치닫는 분들이 있다. 나는 그분들이 왜 산에 왔는지 묻고 싶다. 산에서 산(山)과 수(水)가 만나는 곳, 진경산수화 펼친 곳은 계곡이다. 여기 오래 머무는 것은 그래서다.
산의 바위와 초목도 그냥 무심히 보아넘겨서 안된다. 둘 다 기절(奇絶)하여  천하 절경이지만, 설악산은 바위가 좋고, 지리산은 나무가 좋다. 설악산 천불동, 거제도 해금강이 이름난 것은 빼어난 암산이기 때문이다. 미원장(米元章)은 기묘한 바위를 보면, 기뻐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절을 받을만하다' 하고 예를 갖추어 절 하고, 매양 석우(石友)라고 불렀다 한다. 죽림 아래 물가에 놓인 토파(土坡)는 매양 은자를 기다리는 것 같아 좋고, 기봉(奇峰) 괴석(怪石)은 무심히 구름을 모으고 바람을 몰 아치 듯한 세(勢)가 있어 좋다. 
만장 같은 바위에 손바닥을 대고 천년 세월을 느껴봐도 좋고, 바위 이끼의 고색(古色)을 감상해도 좋다. 청태(靑苔) 속에 피어난 가냘픈 풀꽃을 감상하는 것도 좋은 취미이다. 눈 덮인 바위, 달빛 비친 바위를 보며 시상(詩想)에 잠겨도 좋다. 어쨌든 바위는 산의 뼈대이며, 좋은 산은 반드시 좋은 뼈대를 지니는 법이다. 


산의 나무를 감상함에는 먼저 뿌리를 보는 것이 좋다. 천인단애에 솟아, 암석에 끼이고, 빗물에 씻긴 나무가 노목이 되면, 흔히 뿌리를 노출하고 있다. 마치 세상을 벗어난 선인이 여윌 대로 여위고 나이가 늙어서, 근골이 울퉁불퉁 불거져 나온 것과 같아서 운치가 있다.
지리산 법계사 가는 길에 용같은 뿌리로 바위를 감고, 서너 개 가지를 창공에 거침없이 뻗은  거대한 반송(盤松)이 있었다. 이런 기목(奇木)은 어떤 호사가가 제 아무리 많은 비용을  부담하고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할 나무이다. 나도 이 나무를 목우(木友)로 느끼고, 예를 갖추어 절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 있다. 곁에 닦아가 한동안 나무의 숨결과 바람 타고 날아가는 나무의 향기를 맡은 적 있다.
수원 광교산 정상 근처에는 거대한 철쭉나무가 많다. 높은 곳에 자라는 철쭉은 꽃빛이 연분홍이고 키는 우리 두배나 될만치 거대하다. 풍우에 흙이 벗겨져나가서, 전화통처럼 크고 기괴한 뿌리는 분재하는 사람 넋을 빼놓기에 충분하였다. 약수터 가는 길에는 노스님이 짚고다니는 주장자처럼 생긴 욕심나는 소나무 뿌리가 뻗어 있었다. 땅에 구불구불 노출된 그 뿌리는 오랜 세월 사람의 발길로 반질반질 윤이나 서 지팡이로는 최고의 물건이었다.
대체로 산에 가서 갈 길을 잊은 듯 나무의 수형과 뿌리 모습에 반하여 한가히 살펴보는 습관은 바람직하다, 낭떠러지에 난 것, 돌 위에 난 것, 비스듬히 굽어 바람 타고 다니는 선인(仙人) 같은 것, 물결 밟고 다니는 신녀(神女) 같은 나무를 볼 수 있다. 이 나무 하나하나 손뼉을 치며 넓적다리를 치면서 득의(得意)하여 구경하는 것이 좋은 취미이다.


고인(古人)은 좋은 산에 좋은 산길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산길은 구불구불하여 숨었다가 보였다가 해야 한다. 산길이 죽은 뱀처럼 꼿꼿하면 안 된다. 은사(隱士)가 나귀 타고 다닐만한 길이어야 하고, 산속 어딘가에 유인(幽人)이 싸리문 열어놓고 은거한 모습을 상상해볼 길이어야 한다. 눈 덮인 산속에 홀로 핀 매화가 생각나는 길이어야 하고, 맑은 바람에 머리를 씻은 고사(高士)가 달 아래 거문고 타는 소리를  상상해볼 만한 길이 어야 한다.
모름지기 흉중에 이런 풍류가 있어야 비로소 답산의 의미를 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지금 우리 주변에 고인(古人)의 뜻은 멀고, 시(詩)는 실종되었다. 그래서 글로서 한번 옛날 선비들의 뜻을 헤아려본다.
(한국수필 2011년 7월)
                                                                                        




바위 그 여러 모습에 대한 명상




산이 아름다운 것은 산에 바위와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물과 구름과 안개도 있지만, 물은 하산하기 급급한 나그네요, 구름은 허공을 떠도는 방랑자요, 안개는 아침 저녂에만 나타나는 요정이다.
반면 바위와 나무는 항상 산에 머무는, 산 그 자체이다. 둘을 비교하면, 바위는 남성이고, 나무는 여성이다. 바위는 철학자고, 나무는 시인이다. 바위는 명상을 하게 하고, 나무는 시심을 키워준다. 그중 바위는 산의 뼈대이며, 땅의 기가 모인 곳이다. 그래서 기암 절경은 바위에서 나오고, 바위가 없는 산은 평범한 산이 되고 만다.


 
바위가 많은 산을 악산(岳山)이라 하고, 흙이 많은 산을 육산(肉山)이라 부른다. 설악산과 북악산은 악산에 속한다. 만장같이 거대한 바위가 산정에 버티고 앉아서 천하를 굽어보는 모습처럼 웅혼한 것은 없다. 인간에게 외경심을 가져다준다. 안개에 싸여서 모습을 반쯤 보였다가 숨겼다가 숨바꼭질을 하는 암봉보다 신비한 것은 없다. 우리에게 구름을 밟고 하늘로 올라가는 환상을 안겨준다.
바위가 있어야 나무는 그 진면목을 발휘한다. 진달래가 곱게  핀 절벽은 우리에게 봄의 환희를 알려준다. 담쟁이 잎 처절한 붉은빛에 덮인 암벽은 우리에게 만추의 애상을 보여준다. 천지 가득한 백설의 암봉에 솟은 구불구불 휘어진 늙은 나무가 화려한 눈꽃을 달고 있는 모습은 우리에게 겨울의 고요를 알려준다.


 


그 위에 삼존불이 새겨진 바위도 있다. 그 위에 돌탑이 쌓인 바위도 있다. 그 아래 약수가 솟아나는 바위도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을 가진 바위도 있다.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도 있다. 강이나 산, 구름과 폭포 무늬를 지닌 바위도 있다. 사람이나 새나 거북이 형상의 바위도 있다. 평원처럼 평평한 바위, 산이나 절벽을 닮은 바위, 그냥 추상적으로 생긴 바위도 있다. 이 모든 바위가 다 신비하다.


나는 바위를 볼 때 먼저 이끼부터 살펴본다. 바위가 가장 바위다운 품격을 지니려면 우선 이끼가 아름다워야 한다. 이끼는 태고 때부터 착용한 바위의 유일한 옷이다. 가장 고운 이끼는 '비단 이끼'다. '비단 이끼'는 최고급 초록빛 카펫 같다. 산신이 와서 쉬어갈 요량으로 펼쳐 놓은 것 같다. 너무나 부드럽고 미끈하여 무심히 발을 딛기에는 뭔가 미안하다. 그곳에 씨앗은 바람에 날아와서 보일 듯 말 듯 가냘픈 꽃을 피운다. 참으로 신비스럽다.
'서리 이끼'란 것이 있다. 주로 고산의 큰 바위에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데, 색깔이 서리가 내린 듯 하얗다. 고산의 준엄함과 깔끔함이 내비쳐, 이끼 중에서 가장 품격이 높다. 해발 1천 미터 이상의 바위에는 석이(石耳) 버섯이 자란다. 석이는 흑지(黑芝) 혹은 석지(石芝)라고도 불리는데, 항암작용이 있으며, 오래 먹으면 얼굴색이 좋아지며, 눈을 밝게 한다. 이런 석이가 온통 표면을 뒤덮은 바위야말로 제대로 격을 갖춘 바위이다. 이런 바위 앞에 정좌하면 가장 고요한 명상에 빠질 수 있다.
  
바위의 또 다른 매력은 폭포 옆에서 볼 수 있다. 천인 절벽 밑으로 은하수처럼 폭포가 떨어지는 곳에 있는 위태로운 바위는 장엄미와 비장미를 지녔다. 경탄과 외경을 느끼게 한다.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하얀 물줄기는 바위를 만나면 산산이 부서진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의 위력을 받아내는 바위의 모습은 장엄하고 호쾌하다. 작은 외부 충격에 흔들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뒤돌아보게 한다. 
절벽에 용처럼 뿌리를 서린 노송은 바위의 다정한 친구다. 둘이 만난 모습은 한 폭 그림이다. 물보라 속에 나무와 암석이 서로 굳건히 껴안은 모습은, 우리에게 삶의 자세가 어때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간혹 물 위로 평평한 대를 이루고 뻗어나간 넓은 반석을 볼 수 있다. 그  아래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물결에 낙화가 떨어져 흘러가는 모습, 안갯속에 목덜미에 푸른 띠를 두른 어여쁜 새가 날아와 목을 축이는 광경은, 참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드는 청량제다.


김규진 작품
선인들은 바위 옆에 난초나 국화를 키웠다. 매화나 대나무를 심기도 했다. 바위는 말이 없지만, 이들의 조화는 오히려 고결하다. 바위는 천년을 침묵하지만, 사람들은 바위에게 가련한 백 년의 꿈을 의탁했다. 불상을 새기고, 경전을 보관했다. 둔황 석굴에 불경을 보관했고, 사해 근처의 한 동굴에 히브리어로 쓰인 성경을 보관했다.   나는 선천 후천 세계를 관통한 바위를 신성하게 생각한다. 바위를 미륵이나 부처로 생각한다. 명상의 스승으로 생각하고, 기도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종교와 철학의 산실로 생각하고, 현자의 거처로 생각한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바위 앞에서, 나는 난초나 국화처럼, 매화나 대나무처럼 살고 싶다. 총총한 별빛을 벗 삼아, 고고한 침묵을 배우고 싶다. 인위적 흔적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암석 앞에서, 나는 1천7백 개의 참선 공안을 풀어보고 싶다.
(2014년 지구문학 여름호)




무엇을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인가


                                                                                             
인생 백 년이라지만, 백 년을 살아도 삼만 육천일이요, 갈 길이 구만리라지만, 목숨은 바람 앞에 등불이요, 풀잎에 맺힌 이슬이다. 그 노루 꼬리처럼 짧은 시간이, 문턱 밑이 저승이라는 노년의 시간이다. 직장에서 은퇴한 은퇴자의 시간은 법당에 향 하나가 타서 고요히 재가 되는 그런 짧은 시간이다. 홍시가 꿀로 익어 낙과되고 마는 그런 안타까운 시간이다. 이때에 무엇을 마음에 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봄에는 꽃과 채소를 마음에 둘만하다. 귀 천궁 달이 수레바퀴처럼 도는 세상보다 자연에 맘 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비 내린 상쾌한 아침 뜰에 나가보자. 촉촉한 흙을 밀치고 올라온 수선화 새촉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함박꽃 붉은 촉, 상사초 푸른 촉도 보인다. 부드러운 새촉들은 어린 소녀 같이 싱싱하다. 그 새촉은 마치 우리가 소년 때 만난 첫사랑처럼 아름답다. 우릴 가슴 설레게 한다. 
 봄은 콘닥터가 지휘하는 심포니에 견줄만하다. 꽃이 차례대로 화려한 의상을 입고 무대에 등장한다. 개나리 산수유는 노란 저고리, 진달래는 연분홍 치마, 목련은 하얀 블라우스를 입는다. 매화와 배꽃은 청초하고, 벚꽃은 비단처럼 화려하다. 이때 사람은 벌 나비처럼 이리저리 온갖 꽃의 품에 안겨보아야 한다. 봄 축제 자리에 라일락과 히야신스도 잊으면 안 된다. 라일락은 연인처럼 달콤한 향기 풍기고, 히야신스는 실내에 자색 보라색 노란색 백색의 향기 가득 채워 준다. 천상의 향기가 이럴 것이다. 봄은 정말 음미해볼 만한 환상적 심포니다. 겨울 넘긴 텃밭의 청갓과  부추 몇 잎 식탁에 올리는 재미도 잊어선 안된다. 담박하고 쌉싸레한 푸성귀 맛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건강에도 좋거니와 고인(古人)의 담박한 의취에도 일치한다.


 여름에는 물소리를 마음에 둘만하다. 고요한 물소리를 즐기는 노인은 오래된 벼루처럼 운치 있는 법이다. 여름에 가장 고요한 소리는 물소리이다. 그중 으뜸은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면 그 울림 하나하나가, 산사의 종소리 목탁소리처럼 청아하다. 수정처럼 깨어지는 소리에 몰입하면 천지의 파장이 몸에 스며든다. 거처하는 집이 성당이나 절간처럼 청결하고 고요해진다. 산골 물소리도 좋다. 배낭에 술과 찬거리 담고, 홀로 청산을 찾아보라. 적막 속에서 안개를 마시고 구름을 타면서, 흰구름에 눈 씻고, 솔바람에 이마 씻고, 흐르는 물소리에 마음을 씻어보라. 세상의 모든 시시비비가 문득 저 멀리 모기소리같이 작고 하찮게 들릴 것이다. 


 


가을에는 여행을 마음에 둘만 하다. 구름을 닮아야 한다. 버리고 비우고 떠날 줄 알아야 한다. 한송이 구름처럼, 황금빛 단풍 물든 산 허리 거닐고, 어기야 어기여차 갈대밭 속 한 잎 조각배에 몸 싣고 가야 한다. 갈매기 벗 삼아 외로운 섬 위로 사라지는 황혼을 따라가도 좋을 것이다. 들녂에서 추수하는 농부에게 닦아가 탁주 한잔 얻어마셔도 좋고, 출렁거리는 뱃머리에 가서 어부와 갓 잡은 싱싱한 생선을 흥정해봐도 좋을 것이다. 등대가 보이는 항구의 목로주점을 찾아가도 좋다. 주가(酒家)의 늙은 여인과 젓가락 장단 치며 한번 구성지게 옛 노래를 불러도 좋다. 밤차로 타계하신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 봐도 좋다.
 흔히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다. 그러나 아쉬운 건 인생이다. 여행은 떠나도 돌아올 수 있지만, 인생은 한번 가면 불귀(不歸)로 끝난다. 인생은 온 곳 모르고, 갈 곳 모르는 구름이다. 화려하다가 금방 허망하게 스러지는 구름이다. 버리고 비우고 떠나는 자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겨울에는 차(茶)를 마음에 둘만 하다. 눈 오는 밤에 고서를 뒤적이며 풍로에 차 한잔 끓이는 것이 노년의 운치다. 먹을 갈아놓고 묵난을 쳐보는 것도 좋다. 피리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도 좋다. 허공으로 오르는 차 향기 맡으며 마음 모울 때, 살아온 인생이 투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 한다. 올 때도 빈손으로 왔거니와 갈 때도 빈손 아니던가. 차 한잔 앞에서 마음 비워야 한다. 고승은 지팡이 하나와 발우 하나만으로 족하다고 한다. 스스로 금전과 대인관계에 고민할 필요 없다. 현우(賢愚)도 따질 필요 없다. 명예도 잊어야 한다. 가난하면 청빈을 생각하고, 부귀하면 검소를 생각하면 된다. 마음은 어디서나 자유로워야 한다. 깊은 밤 참선 끝에 홀로 차 한잔 기울이노라면, 흉중에 속계와 선계가 하나가 된다. 차의 품질에 연연할 필요 없다. 오직 맑은 차 한잔의 의미만 가슴에 담으면 그만이다. 


 
  
봄은 꽃을 즐기고, 여름은 물소리 즐기고, 가을은 여행을 즐기고, 겨울은 차를 즐김이 좋으리라. 사계절 이 밖에 할 일이 또 무엇이랴. 아침은 시를 읽고, 오후는 낮잠을 자고, 밤엔 달을 구경함이 좋으리라, 하루에 할 일이 이 밖에 또 무엇이랴. 
은퇴한 노년은 어차피 직장 떠났고, 품에서 자녀도 떠났다. 어떤 면에서 신부님이나 스님 처지와 같다. 벼슬 사양하고 초야에 묻힌 선비 같다. 인생 2막 시작된 것이다. 자서전을 써보는 것도 좋고,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 펼치거나 신앙생활에 몰입해보는 것도 좋다. 눈을 사회에서 다른 데로 돌려보는 터닝포인트가 필요하다. 이제 못에 갇혔던 고기, 새장에 갖혔던 새가 자유를 찾았다. 자식 걱정 모두 버려야 한다. 공작은 깃을 아끼고, 범은 발톱을 아낀다. 이제야말로 처음으로 인간다운 삶을 아끼며 자신을 위해 살 때가 온 것이다. 그동안 밤송이 우엉 송이 다 밟아본 노년이다. 이제 표연히 출세간으로 떠나보자. 천지에 소요유(逍遙遊)할 빈 배 하나 흘러오고 있다. 유유히 그 배를 탈 때가 왔다.
(청다문학 2011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