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일본 문학기행

김현거사 2022. 4. 16. 17:08

일본 문학기행

 

마침 연꽃 피는 철이다. 부여 궁남지 백련과 홍련의 향기가 사방으로 퍼질 때다. 백제 문화 유적 찾아 떠나는 한국문인협회 문학기행 일행을 태운 비행기가 현해탄을 나르는 기내에서, 나는 낙화암 3천궁녀의 얼굴 적신 눈물에다 궁남지 연꽃 향기를 칵테일 해보고 있었다. 칸사이(關西) 공항을 덮은 구름은 천 4백 년 전 조각배에 몸을 싣고 온 백제 도래인(渡來人) 이야기를 펼칠 무대 커튼 같다. 어디서 목쉰 ‘진도 아리랑’ 한 대목 들리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그래서다. 공항에서 오사카로 가는 길가 무궁화가 반갑다. 산록의 안개 낀 대밭은 미풍에 흔들리는 잎새에 떨어지는 실비가 옥구슬 같고, 삼나무 푸른빛에 덮인 산은 물소리 가득하다. 교외의 빛바랜 2층 목조주택은 오랜 풍상 겪어도 기와가 정갈하고, 뜰에 키운 잘 전지 된 오엽송과 호랑가시나무 단정하다.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시가 두 줄짜리 짧은 정형시다. ‘와까(和歌)’라 부르는 그 시의 탄생지는 오사카시(市) 와까현(和歌縣)이다. 왕인박사의 ‘매화 송’(梅花頌)에서 발원하였는데, 지금도 일본의 왕족과 귀족 자제들이 ‘아버지의 노래’(父歌)라 부르며 붓글씨 교본으로 삼고 있다.

‘난파진(難波津)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 겨울 잠자고 봄이라고 피는구나 이 꽃이.'(홍윤기 박사 역)

이 시는 얼핏 보면 봄에 매화를 읊은 단순한 시 같다. 그러나 그 속에 왕인박사의 고향 그리는 깊은 회포가 숨어있다. 왕인은 일본 난파진으로 입도(入島)했다. 봄마다 난파진 바닷가 찾아가 매화를 보면서 바다 건너 고향 영암의 봄이 그리워했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 난파진 이름은 시에만 남아있고, 오사카는 신일본제철 간판과 육중한 골리앗 클레인만 보인다.

스다 하치만(隅田)  신사(神社)에 도착하니, 하얗고 긴 옷소매가 우리 도포자락 연상시키는 궁사(宮司) 데라모토 씨가 안내해준다. 신사는 6세기에 백제 무령왕이 오사카 궁에 살던 친동생 ‘오도호 왕자(南弟王)’에게 보낸 청동거울을 보관한 곳이다. 그 청동거울은 거울 뒤에 말을 탄 백제왕과 인물이 부각되어 있다. 그래 ‘인물화상경’(人物畵象鏡)이라 부른다. 신사 뜰에서 ‘백제시(詩) 낭송회’가 열렸다. 백제 관음 같이 기품 있는 김후란 시인은 자작시 ‘인물화상경’ 읊고, 홍윤기 교수는 ‘교토(京都)에 가시거든’이란 시를 읊었다. 잇달아 추영수, 김지연, 정영옥 시인 낭송이 있었다. 모든 여류시인들의 목소리는 아롱아롱 왕관에 매달린 곡옥(曲玉) 부딪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청동거울 위로 구르는 자수정 소리 같기도 하다. 김년균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인사말도 뜻깊었으니, 헤아려보면, 왕인박사 도일 후 천 4백 년만의 한국문인협회 단체 방문이다. 그날 밤 나는 법륭사 백제관음을 시로 다듬어 보았다.

<법륭사 백제관음>

그의 미소는 마른 종이꽃이다

육탈한 피안의 미소이다

중생의 괴로움 구제하려고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졌다는 관음보살

오른손 부드럽게 들어 손바닥 보인 뜻은

중생의 고난을 받겠다는 뜻이요,

왼손 연꽃처럼 내리어 정병(淨甁)을 잡은 뜻은

중생에게 감로수 내리겠다는 뜻이다

누가 그를 동양의 비너스라 부르던가

애달프고 애달프다

녹나무 깎아 만든 얼굴의 그 자비 미소와  

부드러운 선을 감춘 하반신 옷 무뉘를 조각한

그 백제인의 이름을 아무도 모른다.

 *千手千眼; 천 개의 손과 눈을 가진 만능의 보살. 중생의 고난을 살피는 보살. 관자재보살 혹은 관세음보살

다음에 찾아간 곳은 백제 의자왕의 누이 사이메이(齋明) 천황의 황태자였던 덴지(天智) 천황을 모신 오우미(近江) 신궁이다. 거긴 백제계 후손인 사또(佐藤) 궁사(宮司)가 지키고 있었다. 그는 창 밖에 숲과 이끼 밭이 보이는 다다미방에 우릴 안내해, ‘곤피’ 차와 은행잎이 새겨진 과자를 대접했다. 이쪽의 한 여류가 그를 미남이라고 칭찬하자, ‘일본은 아이누족 남만족 인종 20 퍼센트 빼면, 나머지는 다 대륙에서 온 도래인(渡來人)인데, 그중에서 특히 백제계 후손이 잘생겼다’고  응수했다. 농담 속에 백제 후손이란 자부심이 엿보였다. 버스가 떠날 때 뜰에서 손을 흔들던 그의 하얀 소매가 마음을 흔들었다.

이튿날 아침은 비야코 호수(琵琶湖)를 방문했는데, 호수가 비파잎 같이 생겼는지, 근처에 비파나무가 많은지 모르겠다. 그러나 ‘비파 호수’ 이름 자체가 아름답다. 덴지(天智) 천황은 백제 패망하고 외삼촌인 의자왕이 당나라로 잡혀갔다는 소식에 흰 삼베옷을 입고 정사를 보았으며, 2만 7천 명의 구원군을 파견했다. 그 지원군이 백촌강(白村江=금강) 전투에서 궤멸되자, 백제 유민 2천 명이 비파호 주변으로 이주해왔다고 한다. 그 당시 일본에 온 백제 유민은 부여 정림사 5층 탑 위의 달빛과 고란사의 종소리가 얼마나 그리웠을까. 망국의 아픔 밤마다 눈물이었을 것이다. 비파호 주변의 사찰, 불상, 신사, 탑, 도자기, 와당 하나하나를 무심히 보아 넘길 수 없다.

바다같이 넓은 호반에 석산사(石山寺)가 있는데, 비 내리는 산사 늙은 자미화(紫微花) 꽃잎은 붉고, 본당 올라가는 화강암 계단 밑 연못의 팔뚝만한 비단잉어는 샘물에 목 축이는 나그네 기척에 꼬리 치며 모여든다. 여행의 묘미는 이런 것일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파초암(芭蕉庵) 월견암(月見庵) 찾아가는 그 선경(仙境) 속에서 나는 혼자 두 선녀 독차지하고 산책하는 행운을 맛보았다. 빗속에 우산을 쓰고 대화를 나눈 미인 두 분 고향이 백제 쪽이다. 백제 여인과 우산 들고 백제 유적 찾아가는 묘미가 있었다.

 

정영옥 시인과

나라(奈良)는 사찰과 전통찻집이 매력 있다. 좁고 오래된 골목길 한가로이 거닐다가, 대나무가 심어진 손바닥만한 화단 곁 스기나무 현관 미닫이를 스르르 열고 들어가, 두어 개 탁자 놓인 작은 찻집의 기모노 차림 여주인과 마주 앉아 그가 따르는 전통차를 마셔보라. 그때 고도(古都)의 향기가 고요히 느껴져 올 것이다. 동대사(東大寺)에는 신이 흰 사슴을 타고 내려왔다는 전설이 있다. 경내에 사슴을 방치해놓고 있다. 아장아장 걸어가는 어린 소녀 쫓아가서 고사리 손의 셈베 과자를 뺏아먹는 사슴을 보니, 박목월의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이란 시구가 떠오른다. 비는 낮은 회랑의 지붕을 적시고, 구름 아래 향기 그윽한 이끼 낀 매화나무 적시고, 연못과 동대사 대불전 용마루 양쪽 황금빛 치미(鴟尾)를 적시고 있다. 이 절은 쇼무(聖武) 천황이 대승정으로 모셨다는 백제승 행기(行基) 스님이 조성한 사찰이다. 세계 최대 목조건물에 안치된 대불전 청동대불의 크기는 15미터이다. 부처님 손가락 하나가 사람만 하다.

일본의 교토, 나라, 오사카 지역은 온통 백제 영향권이었다. 우선 ‘나라’란 지명 자체가 우리말 ‘나라’에서 간 것이다. 왕인공원, 백제왕 신사, 백제촌, 백제역, 백제천, 호류지(法隆寺), 도다이지(東大寺) 등 아스까(飛鳥) 문화의 배경은 백제다. '구다라 나이’란 일본말이 있다. ‘백제 것이 아니다’란 말이다. 이 말은 과거 일본인이 얼마나 백제 문화를 숭상했는지 보여준다. 오늘날 ‘혼마’ 골프채라면 사족을 못쓰는 골퍼나, ‘샤넬’ 향수 고집하는 여성은 쉽게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이미 말은 잊어도 고향은 그리운 법. 해마다 공주 백제문화제에 일본 관광객이 10만 명이나 찾아온다고 한다.

일본에 천자문과 경전을 전한 왕인박사 묘소를 둘러본 마지막 밤에 진주고 이유식 선배님과 목로주점 찾아갔다. 일본 술꾼들 속에 들어가서 따끈한 어묵과 정종 맛보지 않으려면 문학기행 왜 가는가.

 한국문인협회 이유식 고문님(오른쪽)과

그날 밤 두 사람은 '요크人이 대서양 건너가서 건설한 것이 뉴욕이고, 백제人이 현해탄 건너가서 만든 것이 '교토'와 '나라' 이다. 역사란 돌고도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 나누며 사이좋게 따끈한 정종 잔 기울이다가 돌아와 잠든 것은 밤 12시 넘어서 였다. (2009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