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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호 선배님을 기리며

김현거사 2022. 3. 13. 11:30
2022년 3월13일 최낙인 선배님이 이영호 선배님 작고 소식을 남강 싸이트에 올렸다.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이선배님의 자취를 더덤어본다. 이선배는 한국 아동문학 계보를 따져보면  방정환, 이원수에 이어 세번째 분이다. 인명사전에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이영호(李榮浩. 1936.9.9

아동문학가. 경남(慶南)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유현리(柳峴里) 출생. 1957년 진주사범을 졸업하고 8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196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동화 <토끼>가 당선, 이어 같은 해 문공부 신인예술상에 동화 <돌팔매>가 당선되었다. 월간지 [소년]의 기자, 1970년 이래 [새한 신문] 편집부 등 역임. 【작품】<토끼>(1966) <돌팔매>(1966) <영원한 아이> <보이나 아저씨> <별을 따려는 아이> <얼굴 없는 기념사진> <열두 컷의 낡은 필름> <파도소리><꾸러기 형제> <핫 하하 즐거운 교실> 【동화집】<배냇소 누렁이>(1966) 【아동소설집】<오두막집 아들>(1973) <빙판 위의 아이들>(1973)

사석에서 듣기론 아마 작품이 경향신문에 <토끼>가 당선되었을 때 일일 것이다. 당선 상금으로 서울에 집을 장만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남명 조식 전기>를 집필했다

문협 사무처장을 했던 김송배 시인이 <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이란 이런 글을 남겼다.

이영호(李榮浩) 선생을 만난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존함(尊啣)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교감한 것은 필자가 문협 사무처장으로 갔더니 거기에서 상임이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신세훈 이사장 재임 시에 어찌어찌하여 김창완 사국 국장을 편집국장으로 전보하고 공석인 그 자리에 필자가 사무처장(사무국장에서 직위 승급 변경)으로 발탁되어 그동안 19년여의 예총 생활을 마감하고 문협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 당시 한국문협에서는 정관 개정이라는 업무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 실무작업을 필자가 전담하여 진행하면서 기획과 실행 등의 구체적인 방안을 이영호 상임이사의 실질적인 지침과 조언에 따라서 수행하고 무난하게 정관을 통과시키는 대 역사를 이루어냈다.
이영호 선생은 1936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진주사범을 나왔다. 1961년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에 소설「부화설. 종」이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선하면서 문단에 나오게 된다. 그 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년소녀 소설「토끼」가 당선(1966)되어 동화작가로 등단하고, 다시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하복(夏服)」이 신인상에 오영수 선생 추천(1967)으로 당선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하게 된다.
그는 그후 동화집과 소설집 등 많은 저서를 출간하였는데, 1966년에 창작 단편동화집 『배냇소 누렁이』 『오두막집 아이들』(1971) 『별을 따는 아이들』 『행복한 매미』(이상 1979), 장편소설 『둘이서 넷처럼』, 동화집『웃으며 생각하며』 『고향으로 간 삐삐』, 콩트집 『개구쟁이 소동』, 명랑소설『꿈꾸는 해바라기』 『쌍둥이 형제』(이상 1980)를 발간하여 아동문학과 소설계에서 동시에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 이후 80년대에도 그의 창작열은 식지 않았다. 장편소설 『거인과 추장』 『대숲 안집 사람들』(1982), 장편소설『늪 마을 스쳐간 바람』, 동화집『옹순이와의 이별』 『감꽃 목걸이』 『그래도 남은 소원』(이상 1983), 장편소설『아버지의 바다』(1984) 『장군의 소원』, 동화집『아기바람 엄마 바람』 『새벽을 달리는 아이』(1985), 소년소설집 『은행잎 편지』, 장편소설『다시 핀 무궁화』, 동화집『버려졌던 풀각시』(이상 1986), 동화집『아버지와 호박 풀 때 죽』 『소년소녀 삼국지』, 전기소설『이원수』, 장편소설 『장순경과 삼총사』 『난파선을 탄 소년들』(1987), 장편소설『남쪽나라 등대섬』 『추적 25시』(1988), 장편소설 『영웅 요지의 꼬마 루딘』, 글짓기 이론서 『새 글짓기 교실』(1989) 등 한 해에 평균 두세 권의 저서를 발행하는 열정이 넘쳐나고 있다.

이영호 선생님의 작품을 읽다 보면 편마다 스며 있는 투철한 작가의 의식을 느끼고 놀라게 한다. 작가라면 누구나 다 작가 의식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분처럼 뚜렷한 이도 없다. 선생님은 동화책을 묶어 낼 때마다 머리말이나 작가의 변에 ‘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가’를 적어놓고 있다. 그 면면이 그 작품을 쓸 때의 사회 문제점이나 민족의 역사에 옹이를 지게 했던 큰 사건을 소재로 다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질곡의 우리 역사를 바로 보게 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이동렬 동화작가는 2002년 가을호 『시와 동화』에서 위와 같이 이영호 선생의 작품에 대한 치열성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1990년대에 들면서도 많은 저술활동이 빛나고 있다. 동화집 『귀염이 와 예쁜이』 『매일 싸우는 아이』, 장편소설『비둘기의 꿈』(1990), 동화집 『이사를 늦춘 휘파람새』 『날개를 허수아비』 『열쇠 목걸이를 찬 아이』 『살구꽃 피던 날』, 장편소설 『열두 컷의 낡은 필름』, 전기소설 『물 위를 걷는 삼손』(1991), 동화집 『말썽이 형제』(1992), 동화집 『마지막 백조』, 장편소설 『얼굴 없는 기념사진』(1993), 장편소설 『임꺽정』 『기특한 녀석』(1994), 그림동화 『동수와 다람쥐』, 장편소설 『당고개를 넘나드는 바람』(1996), 장편소설 『피난열차』, 그림동화 『인어공주를 만난 선장』 『지혜 창작 동화』 『난중일기』(1997), 장편소설 『보물섬』 『80일간의 세계일주』(1999)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는 다시 유아동화집 『엄마 또 읽어 주세요』(2000), 동화집 『멀리 보는 새』(2001), 기소설 『숭고한 영혼 안중근』 『걸리버 여행기』, 영상소설 『괴물』(2006), 장편동화 『덜렁이와 망태할아버지』, 다시 쓴 우리 고전 『옹고집전』, 위인전 『윈스턴 처칠』(2009), 그리고 최근에『이영호 동화 선집』(2013-‘지식을 만드는 지식’ 간)을 발간함으로써 그는 약 70여 권의 동화집과 소설집을 간행한 원로작가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제6회 세종아동문학상(1973), 대한민국문학상(1982), 방정환재단 5. 5문학상(1997), 남명문학상(1997), 한국문학상(2003), 한국아동 불교문학상(2009) 등의 문학상도 수상하는 영광을 차지했다.
또한 그는 문단활동도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아동문학협회 상임이사, 한국문인협회 아동분과회장,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부회장, 회장(1986) 어린이문화진흥회 사무총장, 회장(1997), 한국문인협회 상임이사 겸 『월간문학』 편집주간, 국제 펜 한국본부 이사(현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고, 현재는 문협 고문과 어린이 문화재단 명예회장, 한국아동문학인협회 고문, 그리고 방정환 기념사업회 집행위장을 맡고 있다.

동화작가 이영호 선생님의 ‘삶’에 대해 ‘선이 굵은 선장 같은 사나이(동화작가 이동렬)’라 비유했다. ‘작품’에 대해선 ‘겨레가 당한 질곡의 증언(아동문학평론가 최지훈)’이라고 자리매김했다. 적절한 표현이라고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영호 선생님은 우리 동화가 해방 이후 일본 냄새와 때를 빼고 고유의 서사문학으로 골격을 갖추는데 이바지했으며, 특히 광복에 이은 6.26의 상흔과 그 질곡을 풀고 나온 새싹 같은 겨레 얼을 옹기에 담아 갈무리하듯 개성 넘치는 창작활동에 매진해 왔다. 그동안 작품을 발표할 때마나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또 문단 활동에서도 적잖이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이 글은 2012년 겨울호 『열린 아동문학』(이하 인용)에 게재된 ‘이영호 선생님을 찾아서’에서 인용한 글인데 그에 대한 인품과 작품에 대해서 적절하게 표현된 대목이다. 그는 근무시간이나 밖에서의 대화도 인자하면서도 근엄하고 어쩐지 한 동네에서 함께 살아온 따스한 정감을 느끼게 하는 풍모에서고 존경하는 대 선배임에 틀림없다.
한국문협 시절 미국 L.A. 에서 심포지엄을 마치고 멕시코와 쿠바를 함께 동행한 일이 기억에 새롭다. 쿠바는 우리나라와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기꺼이 입국을 허락하는 그들의 사회주의를 더욱 놀라게 했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의연하시고 <아닌 것>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꼿꼿한 의지를 돌아가실 때까지 보여주셨던, 내가 만난 유일한 분’의 ‘선비정신’ 이원수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논란이 있었던 이원수 선생의 친일작품에 대해서 격한 분노로 감정을 쉽게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김종상 동시인과의 오랜 교분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상주와 함안이라는 먼 지역 교사로 근무했지만 아동문학 교단 동인회와 신문지도협회 등에 활동하면 사귄 사이고, 상경 초 몇 년 마포에서 이웃으로 살게 되어 더욱 돈독해진 사이’라고 했다.
어느 일요일 오후 이영호 선생님께 방문 의사를 밝히고 일산 주엽역에서 기다렸다. 보기 좋게 잘 다듬은 턱수염에 더욱 멋이 넘쳤다. 커피집에서 요즘 문협과 문단 얘기를 나누면서 호프라도 한 잔 대접할까 했더니 통풍이 심해서 금주령이 내렸다고 했다. 건강 유의하시고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보여달라는 주문을 남기고 돌아섰다. (2013년)

 
 
이영호 선배님이 2008년 12월에 남강문학회 싸이트에 직접 쓴 글과 그 글에 달린 댓글 소개한다.
<풍류사랑'에서 '귀천'까지>
- 서울 70객들 연말 모임 성료
 
 

'17일 오후 4시,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 안병남 회원이 전화로 통지한 장소와 시간이다. 서울에 사는 남강 문우회 회원들의 연말 친목 모임이라고 했지만 누가 발의하고, 주선했고, 몇 사람이나 모이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모임 장소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수필문학사 사장인 강석호군의 사무실에 들려 차 한 잔을 얻어 마시며, 지난달 17일에 부곡에서 있었던 동창 모임에 해외 출국으로 참석하지 못해서 궁금했던 낙수들을 듣다가, 약속 시간을 조금 넘겨서야 정해진 장소로 둘이 함께 서둘러 나갔다.
 
먼저 와 있던 이유식, 강종홍, 손상철 회원이 반갑게 내달아와 악수를 나눴다. 같이 서 있던 두 여류, 가녀린 미인이 안병남 여사, 후덕한 모습의 부인이 김영숙 여사라며 인사를 나눴다.  수필가로 알려진 두 여류와는 첫인사였다. 조금 늦게 합류한 우리 두 사람을 합해 모두 일곱 사람이 그곳에서 만나기로 한 회원 총원이라 했다. 마지막 한 분, 오늘 모임의 호스트를 자청한 박용수 고문은 우리가 오늘 한잔 꺾으며 우정을 두텁게 할 장소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연락을 맡았던 안병남 여사와 김 여사가 앞장서고, 우리 일행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슬슬 붐비기 시작하는 인사동 길을 걷다가 이윽고 토속 음식점과 주점, 카페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한참을 들어간 막다른 골목의 한식집으로 안 여사가 우리를 안내했다. <風流사랑>-인사동 음식점들의 대부분 멋있는 이름들이지만 상호가 괜찮은 집이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용수 선생이 웃음 띤 얼굴로 모습을 드러내며 반갑게 손을 잡아 환영했다. 주인 남자와 수작하는 것으로 보아 자주 이용하는 이른바 단골집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모인 사람은 모두 70대 초반에서 중반에 들어선 회원들만으로 안병남, 김영숙, 박용수 이유식, 강석호, 손상철, 강종홍, 이영호 이렇게 여덟이었다. 그리고 그 여덟 사람은 고희를 넘긴 동년배의 공통점도 공유하고 있지만, 비록 서로 만난 일이 없었어도 비교적 자주 카페를 방문하고 글을 올리거나 댓글을 달아 회원들과의 정분 쌓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들이어서 금방 오랜 지인들처럼 스스럼없이 어울리게 되었다.
그 집 특주인 송엽주와 괜찮은 안주를 안 여사와 단골인 박용수 선생이 메뉴판을 보며 의논해서 종이에 적어 종업원에게 넘겨줬다. 음식을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인데 때맞춰 부산의 혜림 정재필 회장이 박용수 고문의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전화기를 건네주어서 먼저 나와 몇 마디 인사를 나눴다. 공항 폐쇄로 만리타국에 갇혀 고생하지 않았느냐고 물어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이유식 선생과도 한참 동안 통화했다. 첫 모임이라 참석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서운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어서 참석한 회원들에게 회장의 그런 고마운 인사를 전했다.
 
박용수 선생은 동향의 글쟁이 후배들과 서울 한복판 한국 정서가 그득한 자신의 단골집 ‘풍류 사랑’에서 오붓한 첫 만남을 갖게 된 감회 때문인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 뜻을 온전히 알아들을 수 없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서둘러 메모지를 가져오게 하여 필담으로 의사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은 제가 쏘겠습니다. 제가 제일 젊으니 선배님들께 한 턱 내야지요. 모자라면 얼마든지 더 시키십시오.”
안주와 술이 들어오자 우리 중 제일 젊은(?) 손상철 선생이 미리 작정하고 있었던 듯 말했다. 갑자기 호스트가 바뀐 셈이지만 귀가 어두운 박 선생은 그걸 알 리 없었다. 우리는 삼락회의 현직 사무총장을 맡고 있고, 얼마 전 첫 시집으로 문학상도 탔으니 그 뜻을 고맙게 받겠다면서 잔을 채우고 호기롭게 건배를 했다.
 
권커니잣커니 술잔이 돌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난무하는 속에 박 선생의 필담 같은 메시지는 계속 돌았다.
우리 회의 작품집 이름에서부터 발간 비 마련 방법, 자신의 역저 <우리말 갈래 사전>의 완벽판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이야기 등등 끝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뚝배기에 쪽박을 띄운 동동주를 회원들에게 권하느라 바빴다.
나는 어쩌다 박 선생과 얼굴을 맞대고 마주 앉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술잔을 비워내고 빈 잔을 권해야 해서 어느새 곤드레만드레가 되어갔다.  내 바로 옆자리의 이유식 선생도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나보다도 더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짓궂은 소리만 한다고 흉보지 마시오. 그 짓궂음 속에 사랑이 싹 나고, 그 싹이 자라 꽃도 핍니다. 진주 문학은 이런 사람다움을 바탕 삼아 꽃 피워야죠'. 나는 박 선생이 휘갈겨 내민 메시지 하나를 돌려보다가 책갈피에 끼워 간수했다. 그의 인품을 나타내는 경구 같은 메시지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차지했던 방의 옆 자리에 왔던 손님들이 우리들의 방담이 너무 시끄러워선지 두 번이나 바뀔 때까지 우리는 줄기차게 마시며 떠들었다. '여기서 끝나면 안국동 전철역 부근 가서 실컷 지껄이다 갑시다'. 박 선생의 이런 메시지가 나온 것은 족히 네 시간이나 죽치고 앉아 부어라 마셔라 떠들어댄 후였다. 하긴 저녁 8시면 초저녁인데 헤어지기는 아쉬운 시간이었다. 노래방에 가자는 사람이 있었지만 어디 가서 차나 한 잔 마시며 숨을 좀 돌린 후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보자는 쪽이 우세했다.
나는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 여사가 하는 <귀천>으로 가자고 했다. 큰 길가에서 가까운 새로 낸 분점 ‘귀천’으로 가보니 젊은이들로 자리가 꽉 차 있었다. 목  여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음식점 ‘지리산’으로 가는 골목길에 있는 <귀천> 본점으로 갔다. 먼저 와 있던 손님이 일어나서 우리 일행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어서 자리에 앉았다. 목 여사를 찾았더니 무슨 행사가 있어서 마산에 갔다고 했다. 종업원 아가씨도 언제 바뀌었는지 낯설었다. 모처럼 친구들과 들렸는데 서운했다. 벽에 걸어놓은 천상병의 시 ‘歸天’을 몽롱한 시선으로 일별 하고는 일행이 모두 오미자차를 주문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늘그막에 와서 친구들과 부인에게 손을 내밀어 하루치 용돈을 얻고, 천치처럼 순박한 웃음을 흘리며 각박한 세상살이 같은 것과 담을 쌓고 살았던 그였기에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가서 정말로 귀천의 독백처럼 이 세상이 ‘아름다웠더라’고 말했을까?
차를 마시며 두 여류와 강석호 군을 기다렸지만 영 오지 않았다. 한참 후에는 박용수 선생도 슬그머니 자리를 뜨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손상철 시인이 쏜 ‘풍류’에서의 ‘사랑’이 너무 걸판졌던 나머지 고희를 넘긴 문사들이 몸을 가누기 어려워 ‘歸天’이 아니라 ‘歸家’를 선택한 게 분명해 보였다.
폐회 선언을 해야 할 모임도 아니니 남은 네 사람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른 망년회를 가졌으니 새해에는 또 고향 사람들끼리 느긋한 신년회를 기대하게 된 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임에 분명하다. -덕암 20ho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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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8.12.18 16:12
    첫댓글 겹친 연말 행사로 고문님의 서울 소집에 응하지 못함을 미안해하다가 아침 일찍 걸려온 병남 여사, 청다 교수의 전화로 아쉬움이 더했는데 서울의 초초맹장들이 모여 뚝배기에 쪽박 띄워 동동주 돌려 마신 풍류 넘치는 덕암의 글 읽으니 그 愛惜함이 눈물이 날 정도네. '수호지'의 양산박 두령들의 모임이 이랬을까?
  • 08.12.18 21:55
    정말 좋은 모임이었고 정이 강물처럼 흘렀습니다 용수씨의 후덕한 마음 씀씀이는 늘 가슴을 훈훈하게 해줍니다 저는 마지막에 배탈이나서 18일 10시가 되도록 불편을 격고있습니다 그래도 좋아요 모처럼 고향의 문우들 만나 남강물에 발 담그고 풍류를 즐기니 무엇이 더 부럽겠습니까 이영호님이 멋지게 글을 쓰셔서 운치를 더해줍니다 봉화
  • 08.12.18 22:23
    서울 사람들 너무 하네. 그런 즐거움을 좀 나누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덕암선생의 송년 모임을 읽으면서 세상에 이른 고향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디에 또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박용수 고문님. 후덕한 마음씀이 눈에 선 합니다. 아무쪼록 자주 만나시고 신년회도 즐거운 모임을 갖도록 하십시요. 새해에는 모든 분을 건강하고 문운이 더욱 융성하시길 빌겠습니다.
  • 08.12.19 10:24
    모임도 좋았고 이영호 선배님 후기가 너무 감칠 맛 납니다. 멋집니다.
  • 08.12.19 13:12
    서울에서 모임이 있으면서 저에게도 한 소식 주셨으면 하고 푸념을 했는데 이제 이해가 갑니다. 죄송합니다. 아무튼 글을 읽고보니 무척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영호님의 글이 몹시 좋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08.12.22 04:49
    누각 안의 현판에 눈길이 오래 멈추는데 문장도 좋거니와 사적으로서 가치가 높아서다. 남강문우[文人]들은 모임 뒤, 이런 기록을 꼭 남겨야 한다.
  • 08.12.22 11:08
    서울에서의 정담자리가 눈에 선합니다. 연말 좋은 나날 보내시고 새해 카페에서 만납시다.
  • 08.12.22 11:29
    덕암선생,잘 읽었오. 용수선배. 상철총장이 자리에 앉은지 두어시간이 지나 분위기가 얼큰해지자 집중포화하듯 술잔이 나에게 전해졌는데 사양은커녕 붕어 물마시듯 벌꺽벌꺽했으니 혀가 꼬부랄질수 밖에 도리있었겠오. 금년분의 우정을 다 마셔본 즐거운 날이엇다 생각하오.
  • 작성자 08.12.22 12:01
    헛참, 역시 정을 나누는 자리에 대해 쓴 글에는 관심이 참 많으시다는 생각이 드네요. 혜림, 봉화, 천성산, 김현거사, 아송, 소로마, 마당골, 청다, 그리고 전화로 재미있게 읽었다고 앞으로 회고적인 수필을 쓰셨으면 하셨던 월계 선생님의 격려와 관심에 묶어서 이렇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까페지기 소로마 선생의 말처럼 앞으로 우리 모임의 후기는 정겨움이 느껴지도록 소상하게 써서 불참한 회원들도 관심을 갖도록 했으면 싶어 좀 장황하게 썼었지요.
  • 작성자 08.12.23 09:52
    이날 목 여사가 마산에 간 것은 마산 출신 이주영(마산 갑) 의원과 (사)문창문화연구원이 3·15 아트센터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천상병 문학세계와 마산문화산업 발전전략' 정책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임이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이 세미나에서 목 여사는 이 자리에 참석한 걸 보고 천상병 씨가 하늘에서 '너는 나 때문에 좋은 걸 가졌다'고 할 것 같다"며 "천상병 씨는 마산 자랑을 많이 했다. 늦게나마 자리를 마련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던 것으로 밝혀졌기에 첨언해 둡니다.
  • 09.01.05 13:39
    서울의 남강문우회원님들은 그 날 밤 인생의 행복을 만끽하셨습니다. 그 날 밤 아름다운 풍경의 감회 속에 배석하신 모든 분들의 인품을 흠모할 수 있었습니다.
 

2009년 남강 문학회 진주 지리산 유람 시에 산청 예담골 찜질방 숙소에서 일이 떠오른다. 사우나 마치고 모이니, 부산 미인 황 소지 이숙례, 그리고 서울 미인들은 어떻게 하느냐. 그냥 마구잽이로 남학생들과 혼숙을 시키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예약한 방은 다 혼숙 방이고, 특별 예약한 작은 방은 단 한 개뿐이었다. 그래 최고령인 김 시장님과 허유 노 선배님께 그 방을 드려야 한다. 아니다. 숙녀분들이 그 방을 쓰도록 배려해드려야 한다. 갑론을박 중에 지천 선배님이 기발한 제안을 했다. 노장들과 숙녀분들을 한 방에 모셔야 한다는 거다. 이 소릴 듣자 싱글벙글 제일 좋아한 분은 이유식 이영호 선배님이다. 혹시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나 자신들도 숙녀방 행운이 오지 않을까 싶었던 모양이다.

남강 문학회 지리산 방문 여행 뒤에도 박용수 선배님이 살던 동두천 요석공주가 원효 스님을 찾아와 거닐었다는 동두천 소요산 갔던 일 등이 떠오르고, 남강 문학회에 친일논쟁에 휘말린 이원수 선생을 옹호하는 <이원수 선생을 그리며>란 글을 소개하고, '댓글에 남겨주신 여러분의 의견을 공론화했으면 하는 생각이오니 회원 여러분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란 글을 올렸던 일과 회원들이 댓글을 달던 일들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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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댓글 천성산 조직의 분파나 이합집산에 대하여는 언급을 않기로 합니다. 평소에 내가 생각해 오던 바를 이 기회에 그 일단이나마 개진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변화하는 환경에 순응을 거부하고 올곧게 살다 간다는 것은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기대를 지키지 못했다고 하여 그것이 극히 그 생애중 사소한 한 부분이고 그것이 그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이라면 지켜나가는 것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그 부분을 가지고 전부를 매도하는 것은 가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는 제기한 자신이 자기를 심판하는 입장에 서있다고 생각해 보면서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도 이 문제를 이해하는 한 방법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김현 거사 09.07.03 21:59

    근본적으로 글 쓰는 사람들 편 가르기 하는 풍조는 좀 문제지요. 자기 작품은 시원찮으면서 말 많은 사람, 까다로운 사람들 많아요. 사람들이 그 동요만 기억하는 아동문학 분야에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의 이원수 선생님 내치고 따로 아동 문학한다면 독자들이 웃겠지요. 별다른 좋은 작품은 없고, 그나마 잘 알려진 좋은 작품에 시비나 붙는다면...... 글 쓰는 일은 인격은 닦는 일이니 신중해야지요.

  • 작성자 09.07.03 23:18

    천성산 회장님과 김현 거사님이 금방 내 글을 읽으시고 제 의견에 동조하시는 댓글을 올려주신데 감사드립니다. 무서운 것이 세상인심임을 절감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이원수 선생님의 부왜 작품 집필은 결코 최남선, 이광수, 그리고 서정주 선생과도 같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조연현, 유치환 선생에 대한 세간의 무서운 질책과 비하가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입니다./덕암

  • 09.07.04 20:10

    협회사를 읽고 그간 노고에 감사합니다. 이원수 선생을 친일부역자라고 매도하는데 반대하오. 그분을 존경한 많은 문인들은 4편보다 수많은 동시를 마음 깊이 새기고 있을 것을 믿고 싶다오. 덕암이 지금처럼 이선생의 공적을 지켜 빛내주시기를 바랍니다. 늘 사명감이 솟길 기원합니다. 아천

  • 09.07.05 07:28

    수필 이전에 동화부터 썼고, 이원수 회장의 한국아동문학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동화집도 수 권 남겼습니다. 이원수 선생의 업적은 폄훼돼선 안 됩니다. 한국아동문학사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기신 분입니다. 이영호 선생의 취지에 공감합니다.

  • 09.07.05 07:59

    어쩌다 또는 어쩔 수 없어 몇 편 쓴 작품을 두고 불문곡직하고 부 왜라고 몰아붙이는 지적 오만이나 폭력에 나는 반대합니다. 친일이 아닌 이상 우리 모두 역사의 죄인이라는 패러다임에서 너그러져야 합니다. 왜 법에서도 정당방위를 인정해 주는가를 생각해 보면 쉬운 해답이 나옵니다. 인간은 우선적으로 초소한의 자기 삶이나 생명의 위협 앞에서는 보호본능이 발동하고 그래서 그와 관련 있는 일체의 행위는 용서되고 정당화된다는 법리해석이 아니겠습니까. 칼자루를 든 의사도 100% 건강치 않습니다. 어느 한 부분 그도 환자입니다. 머리 까락에 홈을 파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덕암 선생, 글응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다오.

  • 09.07.05 21:59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동요를 이원수 선생님이 국민학교 5학년 때 썼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부 왜 작품 4편이 아니고 40편이라도 용서가 될 만큼 나의 살던 고향은 대한민국 최고의 동요입니다 이원수 선생님이 그토록 힘던 삶을 사신 줄 몰랐습니다. 덕암 선생님의 뜻에 열렬하게 동조합니다. 복숭아꽃 살구꽃은 천년만년 이어질 불후의 명작입니다. 덕암 선생님 힘내세요 파이팅 봉화

  • 작성자 09.07.06 22:56

    격려와 동감을 표해주신 청다, 목일, 아천, 봉화 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 글이 게재된 협회보 69호가 출간되었기에 오늘 회보와 함께 힘을 내라는 격려의 글을 창원에 있는 <이원수 문학관> 김일태 관장에게 우송했습니다. 김 관장과 의논하여 가급적 금년 가을이나 내년 여름쯤에 아동문학인협회 심포지엄이나 세미나를 이원수 문학관에서 개최하고 이원수 문학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질 계획으로 있습니다. 여러분의 뜻은 그런 공론의 자리에서도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덕암

  • 09.07.12 00:28

    '이원수 선생님을 다시 곡함'을 늦게야 읽었습니다. 아동문학계에 우뚝하신 분의 작은 흠(부 왜 작품 4편)이 큰 업적을 다 덮어 버릴 수는 없습니다. 후배 덕암 선생님이 '그분의 올곧은 문학정신과 우리 문학사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엄청난 문학적 성취가 송두리 째 폄훼당하는 참담한 세태에 의연히 맞서 나가는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바람'을 외치는 것이 참 아름답습니다. 小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