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감나무

김현거사 2021. 8. 8. 10:33

무더위도 이제 한물갔다. 입추 지나니 바람이 시원하다. 이른 아침 감나무 앞에 선다. 아파트 정원이라 우리 키 다섯 배 넘는 계수나무, 둥치가 사람 허벅지만 한 귀한 라일락 나무도 있다. 그러나 나는 어릴 때부터 보던 감나무 앞에 선다. 초등학생 시절 우리 집은 마당에 커다란 감나무가 셋 있었고, 내가 다닌 천전 학교 교정 일부는 감나무 과수원이었다. 우리 할아버지도 감나무 과수원이 있었고, 삼촌 집도 감나무 과수원이 있었다. 봄이면 감꽃을 먹기도 하고 실에 꿰어 목에 걸기도 했다. 여름엔 단감은 따먹었고, 가을엔 나무 밑에 떨어진 홍시를 주워 먹었다.

77세를 희수(喜壽)라 하고 80세를 산수(傘壽)라 한다. 그 중간이 되었으니 오래 산 셈이다. 그동안 그룹 회장 비서를 20년 했다. 같이 식사하면 막내딸도 설사를 했다는 무서운 회장이다. 산전수전 다 껵으며 어렵게 살았다. 젊은 시절에는 75세까지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너무 오래 살면 주변에 민폐만 끼친다고 생각했다. 60세까지 일하고, 은퇴 후 5년 여행하고, 5년은 내가 항상 그리워하던 지리산 골짝에서 전원생활해보고, 마지막 5년은 병원 가까운 도시서 살면 된다. 은퇴 후 5년 여행은 실행했으나. 명동 출신 아내 반대로 지리산 생활은 못했다. 아내에게 산이란 다른 환경이다. 남편은 아내에게 복종해야 한다. 어쨌든 70을 종심소욕 불유규(從心所欲 不踰規)라 하지 않던가. 이젠 덤으로 산다.

나는 감나무를 보면 고향이 생각난다. 당미언덕이란 곳이 있다. 친구들과 목욕한 곳이다. 건너편에 서장대가 있고, 그 아래 천수교가 있다. 봄엔 신안동 들판 풋보리가 피고, 여름엔 버드나무 밑에 은어가 올라왔다. 나는 그 언덕에 집 하나 짓고, 밤이면 물 위의 천수교 가로등과 별을 보고 싶다. 가로등이 잘 보이는 테라스 난간에 부겐베리아 넝쿨을 올리고 싶다. 흰구름과 저녁노을이 아름다울 것이다. 건물 바닥은 하얀 대리석을 깔 것이다. 뜰엔 감나무 몇 그루 심을 것이다. 가을엔 초등학교 동창 몇 불러 같이 감을 딸 것이다. 밤이면 강물의 흐느낌 소리 듣고, 아침엔 새소릴 들을 것이다. 먼 하늘 별이 된 첫사랑 안부도 알고 싶다. 감나무를 보면 그런 생각들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