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기고 글

`무엇을 마음에 두고 살아야(居士 四樂)/청다문학 2011년호

김현거사 2011. 6. 16. 18:26

    

   무엇을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인가

 

                                                                                             

  인생 백년이라지만, 백년을 살아도 삼만육천일이요, 갈 길이 구만리라지만, 목슴은 바람 앞에 등불이요, 풀잎에 맺힌 이슬이다. 그 노루 꼬리처럼 짧은 시간이, 문턱 밑이 저승이라는 노년의 시간이다. 직장에서 은퇴한 은퇴자의 시간은 법당에 향 하나가 타서 고요히 재가 되는 그런 짧은 시간이다. 홍시가 꿀로 익어 낙과되고마는 그런 안타까운 시간이다. 이때에 무엇을 마음에 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봄에는 꽃과 채소를 마음에 둘만하다. 귀천궁달이 수레바퀴마냥 도는 세상보다 자연에 맘 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비 내린 상쾌한 아침 뜰에 나가보자. 촉촉한 흙을 밀치고 올라온 수선화 새촉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함박꽃 붉은 촉, 상사초 푸른 촉도 보인다. 부드러운 새촉들은 어린 소녀 같이 싱싱하다. 그 새촉은 마치 우리가 소년 때 만난 첫사랑처럼 아름답다. 우릴 가슴 설레게 한다. 

 봄은 콘닥터가 지휘하는 심포니에 견줄만 하다. 꽃이 차례대로 화려한 의상을 입고 무대에 등장한다. 개나리 산수유는 노란 저고리, 진달래는 연분홍 치마, 목련은 하얀 부라우스를 입는다. 매화와 배꽃은 청초하고, 벚꽃은 비단처럼 화려하다. 이때 사람은 벌 나비처럼 이리저리 온갖 꽃의 품에 안겨보아야 한다. 봄 축제 자리에 라일락과 히야신스도 잊으면 안된다. 라일락은 연인처럼 달콤한 향기 풍기고, 히야신스는 실내에 자색 보라색 노란색 백색의 향기 가득채워 준다. 천상의 향기가 이럴 것이다. 봄은 정말 음미해볼만한 환상적 심포니다. 겨울 넘긴 텃밭의 청갓과  부추 몇 잎 식탁에 올리는 재미도 잊어선 안된다. 담박하고 쌉싸레한 푸성귀 맛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건강에도 좋거니와 고인(古人)의 담박한 의취에도 일치한다.

 

 여름에는 물소리를 마음에 둘만하다. 고요한 물소리를 즐기는 노인은 오래된 벼루처럼 운치있는 법이다. 여름에 가장 고요한 소리는 물소리이다. 그 중 으뜸은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다.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는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면 그 울림 하나하나가, 산사의 종소리 목탁소리처럼 청아하다. 수정처럼 깨어지는 소리에 몰입하면 천지의 파장이 몸에 스며든다. 거처하는 집이 성당이나 절간처럼 청결하고 고요해진다. 산골 물소리도 좋다. 배낭에 술과 찬거리 담고, 홀로 청산을 찾아보라. 적막 속에서 안개를 마시고 구름을 타면서, 흰구름에 눈 씻고, 솔바람에 이마 씻고, 흐르는 물소리에 마음을 씻어보라. 세상의 모든 시시비비가 문득 저멀리 모기소리같이 작고 하찮게 들릴 것이다. 

 

 가을에는 여행을 마음에 둘만 하다. 구름을 닮아야 한다. 버리고 비우고 떠날줄 알아야 한다. 한송이 구름처럼, 황금빛 단풍 물든 산 허리 거닐고, 어기야 어기여차 갈대밭 속 한 잎 조각배에 몸 싣고 가야 한다. 갈매기 벗삼아 외로운 섬 위로 사라지는 황혼을 따라가도 좋을 것이다. 들녂에서 추수하는 농부에게 닥아가 탁주 한잔 얻어마셔도 좋고, 출렁거리는 뱃머리에 가서 어부와 갓잡은 싱싱한 생선을 흥정해봐도 좋을 것이다. 등대가 보이는 항구의 목로주점을 찾아가도 좋다. 주가(酒家)의 늙은 여인과 젖가락 장단치며 한번 구성지게 옛노래를 불러도 좋다. 밤차로 타계하신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봐도 좋다.

 흔히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다. 그러나 아쉬운건 인생이다. 여행은 떠나도 돌아올 수 있지만, 인생은 한번 가면 불귀(不歸)로 끝난다. 인생은 온 곳 모르고, 갈 곳 모르는 구름이다. 화려하다가 금방 허망하게 스러지는 구름이다. 버리고 비우고 떠나는 자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겨울에는 차(茶)를 마음에 둘만 하다. 눈 오는 밤에 고서를 뒤적이며 풍로에 차 한잔 끓이는 것이 노년의 운치다. 먹을 갈아놓고 묵난을 쳐보는 것도 좋다. 피리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도 좋다. 허공으로 오르는 차 향기 맡으며 마음 모울 때, 살아온 인생이 투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 한다. 올 때도 빈손으로 왔거니와 갈 때도 빈손 아니던가. 차 한잔 앞에서 마음 비워야 한다. 고승은 지팡이 하나와 발우 하나만으로 족하다고 한다. 스스로 금전과 대인관계에 고민할 필요없다. 현우(賢愚)도 따질 필요 없다. 명예도 잊어야 한다. 가난하면 청빈을 생각하고, 부귀하면 검소를 생각하면 된다. 마음은 어디서나 자유로워야 한다. 깊은 밤 참선 끝에 홀로 차 한잔 기울이노라면, 흉중에 속계와 선계가 하나가 된다. 차의 품질에 연연할 필요 없다. 오직 맑은 차 한잔의 의미만 가슴에 담으면 그만이다. 

  

 봄은 꽃을 즐기고, 여름은 물소리 즐기고, 가을은 여행을 즐기고, 겨울은 차를 즐김이 좋으리라. 사계절 이 밖에 할 일이 또 무엇이랴. 아침은 시를 읽고, 오후는 낮잠을 자고, 밤엔 달을 구경함이 좋으리라, 하루에 할 일이 이 밖에 또 무엇이랴. 

 

 은퇴한 노년은 어차피 직장 떠났고, 품에서 자녀도 떠났다. 어떤 면에서 신부님 스님 처지와 같다. 벼슬 사양하고 초야에 묻힌 선비들 입장과 같다. 인생 2막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자서전을 써보는 것도 좋고,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 펼치는 것도 좋다. 신앙생활에 몰입해보는 것도 좋다. 눈을 사회에서 다른 데로 돌려보는 터닝포인트가 필요하다. 이제야 못에 갖혔던 고기, 새장에 갖혔던 새가 자유를 찾은 것 이다. 살 걱정 자식 걱정 모두 버려야 한다. 공작은 깃을 아끼고, 범은 발톱을 아낀다고 한다. 이제야말로 처음으로 인간다운 삶을 아끼며 자신을 위해 살 때가 온 것이다. 동지에 개딸기 찾듯, 뒤늦게 과거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 그동안 밤송이 우엉송이 다 밟아본 노년이다. 이제는 표연히 출세간으로 떠날 때가 온 것이다. 천지에 소요유(逍遙遊)할 빈 배 하나 멀리서 흘러오고 있다. 유유히 그 배를 탈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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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김창현 /수필가

생년월일;1944년 12월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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